우리 시대 많은 샐러리맨들의 가슴속에는 ‘반칙왕’이 되고 싶은 욕구가 들끓고 있다. 아마 그 영화가 흥행작 대열에 든 것도 그 때문일 게다. 구조조정이다 뭐다 해서 흔들리는 직장, 그 직장 안에서 늘 구박하는 상사, 실적 강박관념에 갇힌 우리는 반칙을 써서라도 한 번 제왕으로 군림하고 싶어한다. 상상속에서라도 말이다.
여기, 그런데 진짜 반칙왕이 있다. 한국타이어 정일룡 과장(36). 평소에는 비서실에서 양복을 말쑥하게 빼입고 회장님, 사장님의 수족이 돼 일한다. 어느 정도 무표정한, 때로 딱딱한 긴장감마저 감도는 얼굴로. 재계 분위기에서 비서실 직원으로 뽑힐 정도면 평소 그의 행실이 얼마나 ‘단정’으로 점철돼 있는지 짐작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매주 토요일 밤만 되면 ‘미친다’. 겨울에는 아이스하키 연습장에서, 나머지 시즌에는 인라인하키 체육관에서.
“2년 전에 처음 시작했어요. 일상화된 업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끼리 인터넷에서 뜻이 맞았죠. 힘들지 않았냐고요? 에구 말도 마세요. 처음 3∼4개월 동안은 한 5분 연습했는데 피를 토할 것 같았어요. 보호장구와 스틱을 합하면 12∼15㎏은 족히 되거든요. 지금이야 뭐, 이것도 가뿐합니다.”
마라토너들이 그렇다고 하지 않는가. 운동량이 극한대에 이르면 몸이 자율적으로 산소 요구량과 공급량을 맞추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한 쾌감을 느낀다고. “운동한 지 40∼50분이 지나면 그런 쾌감이 와요.” 키 170㎝, 몸무게 61㎏에 등번호 96의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와 함께 뛰는 사람들은 모두 15명. 21세의 대학생부터 39세의 직장인까지 연령대와 직업도 다양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평소에는 ‘샌님’같지만 운동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변신한다는 것.
“처음에는 나이 어린 코치들이 ‘96번 형님, 저쪽으로 패스하셔야죠’ 했는데, 그 사이 퍽이 이미 상대편에 넘어가 있었죠. 이제는 서로 친해지다보니 연습시간만큼은 ‘이 ××야, 저쪽으로!!’ 하죠. 진짜 선수와 코치 같아요.”
‘퍽’(하키에 사용되는 공)을 칠 때 무엇을 그리 날리는가 싶어 물어봤다. 회장님, 사장님 얼굴도 떠올리시나요, 하고. “워낙 스피디하게 진행되고 팀플레이가 이뤄지기 때문에 공이 어딨는지에만 신경이 집중되죠. 아유, 상사나 모시는 분 생각할 틈이 없어요.” 복잡한 생각없이 몸의 움직임에 몰두하는 것, 그것이 스포츠의 매력일 게다.
“겨울에는 아이스링크 빌리기가 힘드니까 토요일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연습해요. 인라인하키를 연습할 때는 주말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뒤 일요일 저녁에 모여서 연습하죠. 끝나고 나면 밤참도 먹고, 연습할 때 뭐가 잘됐다, 잘못됐다 ‘복기’도 하고요”.
이런 엄청난 주말을 보내고 난 정과장은 오늘도 오전 7시30분에 얌전하게 출근길에 올랐다. 일상으로 가는 길은 ‘반칙왕’ 생활이 있기에 즐겁기조차 하다.
<하임숙기자>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