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출자제한 '울며 겨자먹기'…한도초과분 10조규모 팔아야

  • 입력 2001년 5월 18일 18시 35분


4대 그룹 계열사인 C사의 K이사는 내년 3월까지 출자총액 제한에 걸려 처분해야 할 주식을 생각하면 끔찍한 생각이 든다. 순자산 25%를 초과하는 계열사 주식은 팔도록 한 제도 때문이다. 증권시장이 침체된 상황에서 상장주식을 팔아야 하므로 매각손실이 생기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는 바로 회사 재무구조 악화로 이어진다.

그나마 상장주식은 손해를 보더라도 팔 시장은 있어 괜찮은 편이다. 비상장주식은 아예 내다 팔 곳이 마땅찮다.

▽증자하기도 어려운 판에 주식까지 팔아야〓30대그룹의 출자한도 초과분은 약 23조원(공정위 집계). 예외 인정을 받아 팔지 않아도 되는 13조원을 제외하면 팔아야 할 주식이 10조원어치다. 전경련은 정부 추산치보다 많은 13조6000억원으로 잡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0조원어치 중 정작 주식시장에서 내다 팔아야 할 규모는 4조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재계에서는 이보다 많은 6조∼7조원으로 예측한다.

공정위는 하루 주식 거래물량(2조∼3조5000억원)을 감안하면 2, 3일치면 끝난다고 장담한다. 재계는 공정위 셈법이 상식 이하라고 반박한다.

D그룹 J부장은 “주식물량이 30대그룹에서 잠겨 있다가 증시에서 매물로 나오면 유통물량으로 돼 주인이 계속 바뀌므로 물량압박을 계속 받게 된다”며 “30대 그룹이 하루만에 다 내다 팔았다 해도 바로 끝나는 게 아니다”고 지적했다.

S그룹 P이사는 “증시가 얼어붙어 유상증자도 어려운 판에 갖고 있는 주식까지 팔 경우 그룹사들이 물량공급의 주범으로 몰릴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남기(李南基) 공정거래위원장은 “30대 그룹사가 비관련 보유주식을 팔면 그 그룹사는 핵심역량에만 집중하게 되므로 주가는 올라가게 돼 있다”고 말했다.

▽비상장주식은 시장도 없어 ‘답답’〓상장주식은 그나마 시장이 열려 있으니 사정은 나은 편. 그러나 한도 초과분의 절반 가량(6조원 가량)인 비상장주식은 내다 팔 길이 없다. H그룹 L이사는 “공정위는 비상장주식의 경우 모기업과 합병하거나 주식을 처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국내에선 팔 곳이 없고 외자유치 작업은 지금 시작해도 내년 3월까지 성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L이사는 “비상장주식은 지분매각이 아니라 사업 자체를 통째 넘겨야 가능한 것”이라며 “유동성이 나쁜 회사라면 헐값에라도 팔겠지만 그렇지 않은 회사마저 ‘덤핑세일’을 해야 할 판”이라고 주장했다.

▽공정위 물량조절 ‘관치 논란’〓공정위는 상장주식이 한꺼번에 물량이 쏟아질 경우 시장에 줄 충격을 줄이기 위해 연중 분산매각을 권유할 방침이다. 조학국(趙學國) 사무처장은 “기업들로부터 매각계획을 받아 특정시기에 많이 몰릴 경우 적절히 나눠서 팔 것을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재계는 이를 두고 ‘신 관치(官治)’라고 주장한다. L그룹 P차장은 “기업들이 주식 활황기에 팔기를 원하는데 공정위가 매각시기까지 간섭하려는 것은 권한 밖의 일”이라고 말했다. P차장은 “이런 일은 요즘 재경부와 금감위도 간여하지 않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 간부는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자본주의 사회라면 창업자가 사업추진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창업자이득’을 제도적으로 막겠다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최영해기자>money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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