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분석체계를 이용하면 기업행태의 진화과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특히 문화, 금융제도 및 기업행태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 기업개혁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업의 변신을 유도하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개혁이 어디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좌승희원장 강연 전문▼ |
- 1. 경제·사회개혁의 틀: 신제도학파/진화경제론적 시각 |
먼저 금융제도가 어떻게 기업행태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은행중심과 주식시장중심의 금융제도 차이에 따른 기업의 행태 차이에 대해 <표2>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미국은 주식시장 중심의 금융시스템을 가지고 있어 기업가치의 평가와 자금조달이 주로 주식시장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경영자는 주주와 투자가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투명경영이 이루어지며 이와 같은 금융방식과 기업경영방식은 그 동안 미국이라는 국가의 독특한 문화·제도적 환경속에서 환경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온 것이다.
<표 2> 문화, 금융제도와 기업행태
그런데 우리나라와 같이 은행중심의 금융제도를 가진 나라에서는 기업에 있어서 주주가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기업인이 회사를 만들고 은행에서 돈을 잘 빌려와서 경영을 잘하면 되는 것이지 (소액)주주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주주가치중심의 경영을 크게 고려하지 않게 되며 투명경영을 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은행이 과거와 같이 정부에 의해 통제되어 자율책임경영체제가 정착되지 못하고 대출심사기능이 취약한 상태에서는 자연히 기업은 권력기관 등과 인맥을 구축하는데 역점을 두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관행하에서는 기업의 주주중심 경영이나 투명경영이 제대로 정착될 수 있는 기반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은행중심체제에서는 주식시장에서의 자금조달보다는 은행으로부터 차입에 의한 자금조달이 많기 때문에 기업의 부채비율이 높게 될 수밖에 없다. 이와같이 기업의 행태는 금융시스템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는데 기업활동에 있어서 외생적인 변수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금융시스템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기업의 행태가 문제가 있으니 부채구조를 낮추라거나 자금조달방식을 바꾸라고 얘기하는 것은 기업들로서는 대단히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다. 금융시스템이 바뀌게 되면 기업들도 자연히 그에 적응하여 행태를 바꾸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명령한다고 해서 기업들의 행태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기업의 경영행태는 그 나라가 갖고 있는 금융시스템이 주식시장 중심인지 은행차입시장 중심인지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즉, 어떠한 금융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기업들의 자금조달 행태는 물론 기업의 경영구조까지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런데 금융제도라는 것도 사실은 내생적으로 결정되는 종속변수라고 할 수 있다. 금융제도라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경제발전단계와 문화나 역사적 전통에 따라 생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주식시장 중심의 금융제도는 영미계통의 경제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이는 이들 나라들이 선진경제로서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자본축적이 이루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주식시장이 활성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은행중심의 금융시스템을 갖고 있는 나라는 대륙국가, 특히 독일, 일본, 동남아 등이다. 영국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독일의 경우, 산업혁명이 먼저 일어난 영국 등에 비해 자본축적이 뒤떨어져 주식시장을 통한 자본조달이 어려웠기 때문에 은행을 통해 전국의 돈을 모아 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독일과 유사한 후발개도국이었던 일본도 이 방식을 따랐고 우리나라나 동남아 국가들도 후발주자로서 은행중심의 경제발전 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주식시장 중심의 금융제도하에서는 공식적인 관계에 주로 관심을 가질 뿐 은행중심의 금융제도와는 달리 인간관계 등 비공식적인 관계 등에 대해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어떤 회사가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면 그 회사 주식을 장기간 보유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고 그 회사의 B/S나 P/L 등에 관심을 가지면 된다. CEO 개인이 어느 집안 혹은 어느 지역 혹은 어느 대학 출신인지 등 인간적인 관계는 별로 중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즉, 주식시장 중심의 금융제도에서는 공식적인 관계가 보다 중시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식시장 중심의 시스템에서는 법치가 제대로 작동되고 상호간에 믿음(trust)이 높다. 서로간에 믿음이 있어야 기업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후꾸야마가 ‘social trust' 라고 한 것도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식시장이 발전하려면 또한 법치의 관행이 제대로 정착되어 있어야만 한다. 법치가 정착되고 상호신뢰가 높아야만 공식적 관계가 정착될 수 있는 것이다. 법치의 전통이 강하고 사회구성간의 신뢰가 상대적으로 높아 공식적 관계를 중시하는 영미계통의 국가에서 주식시장이 보다 더 활성화되고 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은행중심 체제에서는 인간관계 등 비공식적인 관계가 중시된다. ‘relationship banking'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사람간의 인간관계가 돈을 거래하는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주체간 상호 신뢰가 낮고 법치보다 인간관계가 보다 강조되는 문화와 전통속에서는 주식시장보다도 은행중심의 금융제도가 상대적으로 더 잘 정착되게 된다. 즉 은행체제는 상대적으로 사적관계(cronyism)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공식적 사적관계를 중시하는 아시아 경제들에서 은행중심의 금융체제가 주로 관찰되고 있음은 우연이 아니며, 이들 나라의 경우 공식적 관계와 상호신뢰를 필요로하는 주식시장에서 단기투자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금융제도의 선택마저도 경제의 발전단계나 문화나 법치전통 등 외생변수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금융제도까지도 내생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기업행태라는 것은 금융시스템과 문화, 역사적 전통, 법적 전통, 경제발전단계 등의 외생변수에 따라 변화하게 되는 종속변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지난 3년간의 기업개혁 노력은 궁극적으로 “금융제도의 전환”이라는 큰 바탕의 개혁을 선행하는 것이 순리였음을 알게 된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미국식 기업경영이 자리잡기 위해서는 기업자체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이와 동시에 주식시장 중심의 금융제도로 이행하려는 제도적 개선노력이 같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나아가면, 금융제도로서의 주식시장의 활성화는 그냥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취약한 법치문화의 정착,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의 증진, 연고주의에서의 탈피 등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주식시장 중심으로의 전환이 용이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문화의 개혁 혹은 문화를 바꾼다는 일이 1000년도 걸릴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기업개혁이라는 것이 그냥 피상적으로 각종 글로벌 스탠더드의 경영행태를 강제해서 기업을 움직인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업의 지배구조, 기업의 행태 모두는 문화에서부터 그 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개혁은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과제임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또한 1980년대 후반 미국은 자신의 주식시장 중심의 경제가 단기성 투자 등 단기적 경영행태를 초래하기 때문에 일본의 은행중심의 금융과 그에 따른 기업경영행태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들이 학계는 물론 업계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었음을 회고해 보는 것도 우리의 개혁기조를 재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