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승희원장 '정부와 민간의 경제적역활' 강연 전문(5)

  • 입력 2001년 7월 11일 17시 30분


5. 경제위기 이후 기업개혁 정책에 대한 평가

<그림 3>의 기업지배구조 모형에 기초해서 구체적으로 기업정책의 적절성을 판단하는데 기초가 될 수 있는 모형을 구성하면 <그림 4>와 같은 기업정책지도를 만들 수 있다. <그림 4>의 기업정책지도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시하고 있거나 제도개혁이 논의되고 있는 각종 기업정책을 기업의 내·외생변수 개념에 입각해서 도식화해 본 것이다.

<그림 4> 기업정책지도(地圖)

이에 따르면 그 동안 우리나라의 對기업정책은 기업의 내·외생변수 모두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업관련 각종 정책들도 이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좌승희원장 강연 전문▼

- 1. 경제·사회개혁의 틀: 신제도학파/진화경제론적 시각
- 2. 개혁과 구조조정에 있어서 정부와 민간의 역할
- 3. 기업정책의 새 패러다임: 정부가 하느님인 시대에서 '시장이 하느님'인 시대로
- 4. 문화, 금융제도와 기업행태: 기업지배구조의 진화
- 5. 경제위기 이후 기업개혁 정책에 대한 평가
- 6. 향후 금융·기업개혁의 비젼

우선 그 동안 논란이 되어 온 공정거래법상의 대기업에 대한 규제의 많은 부분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내생변수에 대한 규제였음을 알 수 있다. 소유구조 규제, 소유·경영분리 유도, 출자총액 규제, 내부거래 규제 ), 전문화 유도, 다각화 규제, 계열사 규제 등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내생변수에 대한 규제에 해당된다.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 도입된 기조실 폐지 등 기업의 내부조직에 대한 규제나 이사회 제도에 대한 지나치게 경직적인 규제, 빅딜, 부채비율 규제, 상호지급보증 규제 등도 사실은 기업의 내생변수에 대한 규제라고 볼 수 있다. 이사회제도는 기업경영에 대한 감시기능을 하는 측면도 배제할 수 없지만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기업의 내부조직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를 지나치게 경직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결국 기업경영에 제약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과다부채규모, 상호지급보증 관행 등은 이러한 것이 기업건전성에 해가 되기 때문에 억제되어야 한다는 점에 십분 동의한다 하더라도 이 문제를 푸는 방법은 기업에 대한 자금공급 기능을 갖는 기업 견제장치로서의 금융기관의 대출관행, 즉 외생변수의 관리를 통해 푸는 것이 순리이다. 은행의 동일인 및 동일계열 여신한도제도의 강화나 동일인간의 상호지급보증을 허용해온 불건전 대출관행을 금지하는 건전감독의 강화로 푸는 것이 시장원리에 부합하는 정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기업경영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도입된 많은 제도개혁들은 과거 경제력집중억제시책의 큰 틀에서 운영되어온 기업정책에 비해, 주로 기업의 외생변수를 개선하는 데 집중함으로써 시장에 의한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도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은 <표3>에 정리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보면 경제위기 이후 현 정부는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노력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표3>의 내용을 <그림4>와 비교해 보면 이사회제도에 대한 일부 규제를 제외하면 외환위기 이후의 경영투명성 제고를 위한 개혁조치들이 주로 기업의 외생변수 부분에 집중됨으로써, 개별 개혁조치의 내용들이 적절하냐의 논쟁은 있을 수 있지만, 기업정책의 큰 틀은 본고에서 제시하는 패러다임에 많이 접근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재무제표의 정확성과 공시강화, 적대적 M&A등 경영권시장의 활성화, 지배주주의 책임강화, 대표소송제 도입 등 주주권 강화 등은 기업의 외부여건에 대한 개혁조치로서 그 필요성이 인정되는 부분이다.

<표 3> 경제위기 이후의 경영투명성과 기업지배구조 정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의 제도개혁 추진과정에서 정책의 내용이 한국적 문화관행, 법적전통에 적합한지 여부, 정책의 우선순위와 속도 등에 관해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제시한 정부와 기업의 역할 모형을 통해서 보면,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대규모 공개기업과 금융기관이 사외이사 비율을 50%이상 유지하도록 하는 정책이나 대기업들의 부채비율을 200%로 규제하는 정책 등은 각 개별기업들의 특성과 우리나라의 금융제도 특성을 무시한 기업의 내생변수에 대한 획일적인 규제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또한 연결재무제표 대신에 결합재무제표를 의무화한데 대한 논란, 출자총액한도제라는 내생변수에 대한 규제완화가 재규제되는 과정에서의 적절성 논란, 집중투표제와 집단소송제를 강제하려는 조치의 적절성 논란 등 개혁의 내용자체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집중투표제의 경우는 내부조직인 사외이사의 선임과 관련된 제도이기 때문에 CEO나 이사회의 판단에 의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순리이며, 이런 점에서 필요하면 정관에서 배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다음으로 대표소송제는 기업의 외생변수로서 정부가 결정해 주어야 할 제도이며, 이런 점에서, 제도도입은 일단 적절하다 할 수 있다.

한편 최근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집단소송제는 논리상 기업의 외생변수로서 기업견제 장치이기 때문에 정부가 제도도입을 주도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볼 수 있지만, 미국 등에서의 남소(濫訴)와 같은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사실행위와 손해발생간의 인과관계 입증문제’라든지 ‘변론주의 예외인정’과 같이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대륙법 체계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도입에 신중을 기할 필요도 있다 할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투자자들이 단기성 투자에 치중하고 있으며 또한 투자원본 훼손을 수용하지 못하는 행태때문에 이 제도가 의외의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미 도입된 대표소송제를 보다 활성화하면서, 동시에 대륙법 체계를 따라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있는 유사한 형태의 민사소송법상의 단체소송제(선정당사자제도)를 보다 활성화하는 대안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도입하여야 한다고 할 경우에는 주식 장기보유자(예컨대 2년 이상 등)에게만 자격을 제한하거나 소송대상을 과실여부가 지극히 명백한 경우에만 한정함으로써 남소의 여지를 줄이고, 회계사, 증권사 등 관련 당사자의 피해 가능성을 낮추는 장치들도 도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현 정부는, 대기업문제를 ‘경제력집중억제시책’의 틀에서 해결하려 했던 이전의 정부정책과 비교할 때 크게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경제력집중 또는 사업구조의 방만화는 경쟁제한적인 정부정책, 기업지배구조 등과 같이 주어진 제도의 유인구조에 대해 경제주체가 반응한 결과이며, 따라서 제도의 유인구조를 그대로 둔 채 결과적 현상을 문제삼는 경제력집중억제시책은 이미 알고 있듯이 우리 나라의 대기업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경제력집중억제시책도 재검토가 불가피하지 않나 판단된다.

경제위기 이후 지난 3년 반 동안 경영투명성과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많은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우리 나라의 기업지배 관련 제도는 다른 나라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선진화되었다. 일부에서는 상당한 제도개혁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효과가 미흡하다며 보다 강력한 추가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제도의 ‘역사적 경로의존성’과 제도변화의 단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 지금의 단계에서 경영투명성과 기업지배구조의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은 기왕에 형성된 제도의 일관되고 반복적인 집행이다. 이러한 과정이 없이 제도변화의 내용이 즉각적으로 시장에 확산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격’이 아닌가 싶다. 특히 우리 사회에는 법치의 관행이 취약하여 ‘규칙따로 행동따로’의 고질적인 관행이 만연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기업지배구조의 실질적인 내용을 개선하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작업은 강력한 새 제도를 모색하는 일이 아니라 제도변화의 내용이 관행의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기존 제도를 엄정하고 일관된 기준 하에 반복적이며 상시적으로 집행하는 일일 것이다.

더 나아가, 설령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제도라고 하더라도 특정제도의 보다 깊은 바탕으로서의 국내문화, 관행 및 가치관과의 적합성을 갖지 못할 경우, 운용에 많은 거래비용을 초래하게 될 뿐 아니라 심한 경우 제도자체가 무용지물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 왔음에 유의하여, 제도개혁의 내용을 우리의 여건에 맞게 어떤 행태로 변형(transform)시켜야만 할 것인지에 대한 보다 많은 고려가 따라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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