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6월 건국 이후 처음 단행된 ‘부실은행 퇴출’로 막을 연 금융 구조조정은 지난 4년 동안 금융기관 수를 2102개에서 1600개로 줄였다. 특히 무분별한 외화차입으로 위기의 진앙이 됐던 종합금융회사들은 97년말 30개에서 무려 26개가 퇴출되거나 합병돼 종금업 자체가 사라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금융권 무수익여신은 98년 초 112조원에서 올해 9월엔 27조원대로 급감했다. 한때 금융기관의 ‘살생부’였던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도 97년 말 7.04%에서 11%대로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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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재정지출 늘려 성장률 겨우 유지 |
금융 구조조정의 핵심이었던 은행들의 주주 중시, 수익성 중시 경영도 대세로 굳었다. 올 9월까지 22개 은행이 올린 순익만도 4조3878억원. 낙하산인사가 판쳤던 금융권 경영자 중에는 이제 드러내 놓고 정부 시책에 반기를 드는 이가 생겨났다. 정부도 무턱대고 압박하기보다 외국인 대주주와 기관투자가들의 눈치를 살핀다. 위성복 조흥은행장은 “글로벌 스탠더드가 드디어 은행권에 정착되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처럼 외형과 수익성을 개선하기까지 큰 희생이 따랐다. 부실청소를 위해 공적자금이 150조원대까지 투입되면서 그 이자만도 내년에는 4조1500억원을 부담해야 할 처지다. 공적자금 회수가 어려워지면서 현재의 부실처리를 몇 년 뒤 세금으로 미뤘다는 비판이 나온다.
99년 금융시장 마비를 막기 위해 대우채 환매를 제한하고 올 초 산업은행이 회사채신속인수제를 도입한 것도 현 정부가 시장주의 원칙을 스스로 훼손한 임기응변식 처리였다는 학계의 지적이 많다. 이동걸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관치 심화와 △대그룹의 금융산업 영향력 확대를 구조조정의 문제점으로 꼽았다. 현재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은행은 전체 22개 중 제일 신한 한미 하나 등 5개 안팎뿐이다.
전문가들은 은행을 제외한 증권 종금 금고 신협 등은 사실상 구조조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진단한다. 금고는 4년 동안 231개에서 121개로 줄었고 신협도 1666개에서 1270개로 줄었지만 정부조차도 ‘수익성’ 부분에선 할 말이 없다. 특히 신협은 경영진의 모럴 해저드를 견제할 장치가 정치권의 로비에 막혀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을 긴장시킨 정현준 진승현 이용호 등 3대 ‘게이트’는 직접 자본시장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코스닥 투자 열풍에 편승한 이들은 모두 정치권 및 검찰 실세의 비호를 받았다는 의혹을 샀고 주가조작에도 나서 개미투자자들을 울린 경우. 이들의 부실공시와 회계 분식과정은 아직도 우리 금융시장이 선진권과 큰 격차가 있음을 보여줬다. 증권시장이 완전 개방되면서 외국인 투자지분이 37%대로 치솟는 바람에 국내 증시가 외국인들에게 휘둘리는 것도 문제다.
11월 1일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으로 국내에도 총자산 185조의 매머드 은행이 출현했다. 그러나 세계 기준으로는 고작 60위권이다. 국내 부동의 1위인 삼성생명도 국제 서열에서는 20위 밖. 윤여권 금감위 은행감독과장은 “은행권의 수익성이 좋아졌지만 대형화 추세에 맞는 과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비용 절감 여지도 많고 리스크 관리 등 선진 금융기법 개발 등 내실 개혁에 나설 때라는 진단이다. 위성복 행장도 “대형은행의 탄생으로 지나치게 많은 은행이 시장에 참여하는 오버뱅킹(Overbanking)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될 것”이라고 말하고 “시장이 주도하는 금융 구조조정은 지금부터”라고 말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금융위기 '뇌관' 기업부실 여전
‘기업과 금융부문 중 어디를 먼저 손대나.’
98년 4월 금융 기업 구조조정의 총대를 멘 금융감독위원회가 설립 직후 맞닥뜨린 난제다. 기업의 구조조정을 감독할 금융부문을 먼저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과 금융의 부실이 기업부문에서 초래되는 만큼 기업을 먼저 손대야 한다는 ‘선(先) 기업론’이 팽팽히 맞섰다. 결국 이헌재(李憲宰) 당시 위원장은 “두 부문을 동시에 손대지 않으면 둘 다 부실해진다”고 결론을 냈다.
그러나 99년 7월 대우그룹을 시작으로 부도 위기가 현대 주력사인 건설 반도체(하이닉스)로 이어지면서 금융권의 부실은 천문학적으로 늘었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관행은 깨졌지만 우려했던 대로 기업과 금융부문이 동반 부실해졌던 것. 이제까지 투입된 공적자금 150조원의 대부분은 이 부문 부실 청소에 쓰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4주년을 앞둔 지금도 기업 부실은 금융권 위기를 초래할 ‘뇌관’으로 남아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올 상반기 우리나라 제조업의 부채비율은 198.3%로 국제 기준인 200%를 맞췄다. 그러나 이자보상비율이 100% 미만인 부실업체가 조사대상 1740개 업체의 30%나 차지했다. 이자보상비율이 100% 미만이라는 것은 벌어들인 영업이익으로 자금 조달비용을 대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들 기업의 금융권 여신은 부실채권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업 부실이 줄지 않는 것은 장사를 못하기 때문. 자산가치가 오르거나 초저금리 덕에 회사는 그럭저럭 꾸려가지만 ‘기본’인 영업에서 수지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환율 하락, 엔저(円低) 등 수출여건도 악화돼 기업들의 수지개선 가능성은 더 줄었다.
물론 4년 동안 은행의 기업 감시기능은 크게 향상됐다. 기업회계의 투명성도 제도상으론 선진국 수준. 그러나 미국 월가에 부실기업들이 발도 못 붙이는 것에 비하면 금융권의 기업 감시장치는 여전히 느슨하다. 외환은행의 한 임원은 “솔직히 대출금이 5000억원이 넘어서면 기업 경영감시는커녕 운명공동체가 되는 셈”이라고 털어놓았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