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호는 자동차 선택에서도 날로 두드러져 간다. 비포장도로를 주행하거나 많은 짐을 싣고 야영을 떠나는 젊은 캠핑족들의 차로만 여겨지던 RV(Recreational Vehicle)가 승용차가 늘어선 도심 출근행렬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운전자도 젊은 남성에서 연륜있는 중년층과 여성으로 바뀌고 있다.
‘RV’는 이미 21세기 자동차시장의 총아. 세계적인 규모에서 출시되는 종수가 전통적인 승용차인 세단보다 많고, 판매 총 대수에서도 세단을 앞지르는 추세다.
▽RV는 비즈니스정장〓최근의 RV는 명품 의상에 비유하자면 정장인 ‘조르지오 아르마니’ 보다는 캐주얼한 비즈니스 정장인 ‘아르마니 익스체인지’에 해당한다. 승차감, 편의 장치에서는 웬만한 고급 세단을 능가하며 주행성능은 스포츠카에 버금간다. 자동차업체들은 RV의 주 소비자층이 바뀌어 대부분의 시간을 산길이 아닌 포장도로 위에서 지낸다는 특성을 고려해 ‘외모는 터프하게, 실내는 안락하게’ 라는 개념으로 RV의 디자인을 바꾸고 있다.
이제 RV 운전자는 모험을 즐기는 젊은이들만이 아니다. 아이가 둘만 돼도 통학용으로 미니밴을 구입하는 미국처럼, 짐을 많이 싣고 다녀야 하는 주부들이 편리성 때문에 RV에 관심을 갖는다. 운전자세가 높아 시계가 확 트이기 때문에 남편들도 승용차보다는 안전하다는 생각에서 아내에게 RV를 권한다. 도심 속에서 당당하게 ‘끼어들기’를 하는 커리어우먼의 차이기도 하다. 식구가 많아 차가 한 대 더 있는 집의 ‘패밀리카’ ‘세컨드 카’만으로 RV가 주목받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용도는 출퇴근용이지만 세단의 단조로운 디자인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비즈니스맨의 ‘퍼스트카’로도 이용된다.
▽크로스오버 디자인〓최근의 RV에서 주목할 변화는 여러 차종의 특성을 하나로 결합한 ‘장르파괴’ ‘크로스 오버’다. 픽업트럭, 캠핑카, SUV(Sports Utility Vehicle) 등이 고급 세단을 흉내내며 조금씩 변형돼 SUT(Sports Utility Truck), SAV (Sports Activity Vehicle), SLV(Sports Luxury Vehicle)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의 RV시장에 선을 보이고 있다.
RV에서 시도되는 ‘크로스 오버’의 핵심은 하나의 차종에 다양한 기능을 섞어서 소비자들의 이런저런 욕구를 한번에 충족시키는 것. 세단이 지프의 기능을 갖는다든지 지프의 기능을 하면서도 스포츠카 형상을 갖추고 있는 식으로 갈수록 자동차의 장르 구분이 모호해진다. SUV의 세단화, 세단의 4WD화·미니밴화 현상이 함께 이루어지고 ‘세단+픽업트럭’,‘스포츠카+SUV’ 등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복합적인 형태의 RV들까지 등장하고 있다.
▽2002 RV 디자인의 해외 경향〓초기 RV시장을 주도하던 미국은 최근 몇 년간 미니밴의 판매가 정체를 보이자 전통적으로 강점을 갖고 있는 경 픽업트럭을 중심으로 변형 SUV디자인에 주력하고 있다.
유럽은 세단을 기본형으로 한 왜건형4WD와 소형미니밴이 주축이나 최근에는 벤츠, BMW 등 전통의 고급 승용차 메이커들이 브랜드 이미지를 살린 고급SUV를 출시하면서 새롭게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스포츠카 전문 업체인 포르쉐까지 RV를 선보일 예정이다.
8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일본의 RV열기는 같은 외형으로 시장에 맞게 기능과 사양을 세분화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토요타 렉서스, 닛산 인피니티등 하나의 외형디자인으로 경차부터 대형차까지 제품을 다양화해 모델 수에서 승용차를 앞지르고 있다. 오래 전부터 미국시장에 진출한 경험을 살려 미국의 RV에 비해 디자인과 운전자 편의성을 강화하는 쪽에 주력하고 있다.
▼쌍용 렉스턴▼
‘미래의 트렌드를 구현한다’는 뜻의 ‘네오 퓨처리즘(Neo-Futurism)’을 키워드로 외관과 실내를 표현했다. 바디라인은 물 흐르듯 부드럽고 거침없는 힘이 느껴지며 헤드램프와 리어 컴비네이션 램프는 보석을 새겨 놓은 듯한 화려한 디테일이 돋보인다.
▼현대 산타페▼
국내에 본격적인 SUV시장을 연 차종이다. 디자인도 애초부터 북미수출을 겨냥해 만들어져 다분히 ‘미국차’같은 느낌을 준다. 본네트 양쪽으로 나 있는 돌출 라인은 근육질의 스포츠카를 연상시킨다.
▼벤츠M 클래스▼
고급 승용차만 고집하던 벤츠가 미국시장을 겨냥해 만든 첫 고급 RV다. 듀얼 및 사이드 에어백, CD 체인저, ABS 등을 기본사양으로 했으며 옵션에 따라 가죽과 호두나무 패널을 사용한 것도 있다. 3개의 등받이로 된 뒷좌석은 하나로 접을 수 있다.
▼BMW X5▼
험로를 달리는 오프로더의 거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고 고급세단의 세련된 감각이 주를 이룬다. BMW는 X5를 선보이면서 SUV대신 SAV(Sports Activity Vehicle)라는 새로운 용어를 썼다. ‘스포츠적인 활동을 하는 차’라는 뜻이다.
▼크라이슬러PT크루저▼
복고적인 크로스오버카의 개념을 꽃피운 차가 PT크루저다. 앞뒤 스타일은 1940∼50년대의 복고풍이지만, 옆모습은 다분히 현대적이다. 실내 역시 외관과는 달리 첨단기기를 장착한 21세기 무드.
▼렉서스 RX300▼
미국시장에서 고급브랜드로 자리잡은 토요타 렉서스의 첫 번째 RV모델이다. 지난해 미국의 자동차전문잡지들의 조사결과 혼다 CR-V와 함께 최고의 도시형 SUV로 뽑힐 정도로 미국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정주현(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