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당시 한국에서 이 회의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려 7년이 넘게 계속된 UR에 대해 한국 국민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협상이 6년 가까이 끌며 막바지로 치닫기 시작한 92년 봄 이후 쌀시장 개방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면서부터였다.
언론의 뒤늦은 문제 제기로 여론이 비등하자 정치권에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관심은 대단히 정략적이었다. 쌀시장 개방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여당은 차마 국민에게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했다. 반면 대선을 앞두고 호재를 만난 야당은 ‘쌀시장 개방 절대 불가’를 외치며 마음껏 선거전략으로 활용했다.
‘대통령직을 걸고 쌀시장 개방을 막겠다’는 공약도 그렇게 나왔다. 이 공약은 후에 김영삼 대통령 자신을 겨냥한 비수가 되고 말았다.
준비 없는 나라의 협상 결과가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은 뻔하다. 지키지도 못할 공약에 대한 부담 때문에 다른 사안을 양보해서라도 농업에서 조금의 명분이라도 얻어야 했다. 그 결과 정부는 쌀시장과 함께 국민의 신뢰까지 잃었다.
일에는 ‘긴급한(urgent)’ 일과 ‘본질적인(essential)’ 일이 있다. 한국 사회는 빠른 해결이 필요한 긴급한 일에는 엄청나게 기민하게 대처하는 장점이 있다. 서구사회와 같은 갖춰진 기반시설 없이 짧은 기간에 훌륭하게 치러낸 88서울올림픽이 단적인 예다.
‘압축성장’과 ‘스피드’로 상징되던 사회 풍토는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같은 비극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빈털터리로 시작한 한국이 고속성장한 원천이었다.
그러나 당장 급하지는 않아도 장기적으로는 미래를 결정지을 수도 있는 본질적인 일에 대해서는 대단히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UR협상이다. 7년의 협상 기간이 막바지에 이르러 긴급한 일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관심을 가진 것이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과거와 같은 고속성장이 불가능해진 현재 시점에서는 ‘본질적인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더 이상 벼락치기 공부로는 우등생이 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번 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도하라운드 무역협상위원회(28일)와 같은 날 청와대에서 열리는 ‘세계 일류경쟁력 실현을 위한 R&D 전략회의’는 이런 본질적인 일에 해당한다. 31일로 예정된 대한민국 10대 신기술 선정도 미래를 위한 준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김상영기자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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