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사장단 회의를 주재할 때 이런 비유를 들며 우수 인력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한다. “회사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인재라면 연봉을 아무리 많이 줘도 좋으니 데려오라”고 사장들을 다그친다. 반도체사업 초기에는 이 회장이 직접 기술인력 스카우트에 나선 적도 있다.
최근 공학지식과 경영능력을 겸비한 엔지니어 출신의 ‘테크노 최고경영자(CEO)’가 공채출신 비서실 인맥이 주류인 삼성 경영진의 또다른 핵심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엔지니어출신 CEO는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등 10여개의 세계시장 점유율 1위 제품을 확보하는 원동력이 됐다. 특히 주력업종인 전자관련 계열사에 걸출한 스타 경영인이 많다.
▽테크노 CEO의 트로이카〓삼성전자의 윤종용(尹鍾龍) 부회장, 이윤우(李潤雨) 사장, 진대제(陳大濟) 사장은 공대 출신 삼성CEO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인다. 지난해 삼성전자 경영진에 할당된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 규모에서 윤 부회장은 이학수(李鶴洙) 삼성 구조조정본부장과 함께 가장 많은 10만주였고 이윤우 진대제 사장은 공동 3위인 7만주였다.
세 사람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선후배 사이. 윤 부회장이 62학번으로 가장 선배이고 이 사장은 65학번, 진 사장은 70학번이다. 윤 부회장과 이 사장은 공채로 입사했고 진 사장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IBM에서 근무하다 1985년 삼성에 합류했다. 공사석을 가리지 않고 두 후배 사장은 윤 부회장을 ‘맏형’처럼 깍듯이 대한다.
삼성전자의 경영 전체를 총괄하는 윤 부회장은 고 이병철(李秉喆) 창업주 때부터 TV VCR 등 전자사업의 현장을 지켰다. 특히 비서실을 거치지 않고도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구조조정위원회의 좌장을 맡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는 이건희 회장의 ‘선문답(禪問答)’식 지시를 가장 잘 해독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미국 포천지(誌)는 그에게 ‘기술마법사(Tech Wizard)’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비즈니스위크는 2000년 세계 25대 CEO의 한 사람으로 뽑기도 했다. 장남 태영씨(28)는 탤런트로 활동 중이다.
이 사장은 26년간 삼성의 반도체 역사와 함께 해온 ‘토종 엔지니어 CEO’의 대표주자. 기흥공장장으로 일하던 80년대 중반, 일본업체의 덤핑공세와 반도체 경기침체기에도 과감하게 256KD램과 1메가D램 양산체제를 갖춰 삼성 반도체가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했다. 서글서글한 외모답게 성격도 호탕하다.
진 사장은 삼성전자의 미래를 책임질 ‘실세(實勢)형 경영인’으로 주목받는다. 64메가D램과 128메가D램에 이어 1기가D램까지 세계 최초의 개발을 주도해 국제 전자업계에서 ‘미스터 칩(반도체)’이라는 애칭으로 통한다.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李在鎔) 삼성전자 상무보에게 첨단기술 동향을 브리핑하고 외국기업 경영인과의 모임을 주선하는 등 ‘핵심 가정교사’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의 두터운 엔지니어 경영인맥〓이들 외에도 4명의 엔지니어 출신 실력파 사장이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고 있다.
이기태(李基泰) 사장은 노키아 모토로라 에릭슨 등에 이어 삼성 휴대전화를 세계 4위로 끌어올린 ‘애니콜 신화’의 주역. 애니콜로 지난해 1조원의 순익을 올려 반도체 부문의 부진을 만회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외국인 바이어 앞에서 휴대전화기를 땅바닥에 내팽개친 뒤 이 단말기로 전화를 걸어 품질을 과시한 일화가 있다.
임형규(林亨圭) 이상완(李相浣) 황창규(黃昌圭) 사장은 반도체 총괄대표인 이윤우 사장을 보좌하면서 각 부문을 챙기고 있다.
임 사장은 삼성 반도체가 자체 양성한 해외박사 1호(미국 플로리다대). 신기술 습득에 대한 집념이 강한 학구파로 비메모리 분야의 저(低)부가가치 제품을 퇴출시키고 핵심기술 위주로 사업구조를 재편했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전자공학 박사인 황 사장은 미국 인텔사에서 일하다 1989년 삼성에 영입됐다. 1994년 세계 최초로 256메가D램 개발에 성공한 것을 비롯해 10여건의 해외특허를 갖고 있다.
이상완 사장은 삼성전자의 액정표시장치(LCD) 부문을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주역. 과묵한 성품이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즐겨 신규사업의 적임자로 꼽힌다.
▽분야별로 특화된 전문 경영인〓삼성SDS 김홍기(金弘基) 사장은 인문계(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컴퓨터 지식을 익혀 정보기술(IT)업체의 CEO 자리에 오른 케이스. 그룹의 CIO를 맡아 삼성 전체의 정보화 작업을 주도하고 있다.
삼성종합화학 고홍식(高洪植) 사장은 현장중시형 경영인. 화학산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 기회있을 때마다 “화학은 공해산업이 아니라 환경친화형 산업”이라고 주장한다.
삼성정밀화학 박수웅(朴秀雄) 사장은 제일제당 근무시절 숙취해소음료인 ‘컨디션’을 히트시킨 이 분야 베테랑. 삼성의 미래사업인 생명과학 신기술 개발에 힘쓰고 있다.
강호문(姜皓文) 삼성전기 사장대우는 반도체 및 컴퓨터 전문가로 지난해 중국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이동통신 장비시장 진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삼성SDI 배철한(裵哲漢) 부사장의 일에 대한 열정은 엔지니어 임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될 정도. 1985년 모니터용 브라운관을 자체 개발할 때 납기를 맞추기 위해 20일동안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식사도 걸러 몸무게가 17㎏이나 빠지기도 했다.
박원재기자 parkwj@donga.com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박정훈기자 sunshade@donga.com
▼삼성의 CEO
경영진 재량권 커…영입파 임원 30% 넘어
삼성 경영의 정점(頂點)은 당연히 오너인 이건희 회장. 하지만 이 회장은 그룹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큰 흐름만 결정하고 일상 업무는 경영진에게 맡기는 스타일이어서 전문경영인의 재량권이 상당히 큰 편이다.
이는 고 이병철 창업주의 지론인 ‘불신물용 용인필신(不信勿用 用人必信·믿지 못하면 아예 쓰지를 말고, 일단 사람을 쓰면 믿고 맡긴다)’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 외환위기 당시 기업들이 앞다퉈 자산매각 협상에 나섰을 때 일부 대기업은 일일이 오너의 허락을 받느라 시기를 놓쳤지만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은 사실상 전권을 갖고 일을 처리했다.
삼성 전문경영인 가운데는 여전히 공채출신이 많은 편. 하지만 이 회장이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한 이후 아래 직급으로 내려갈수록 전통적인 인맥구도가 크게 바뀌고 있다고 삼성측은 설명한다.
삼성의 상무보 이상 임원 1060명 가운데 공채와 비공채의 비율은 현재 68 대 32. 1990년대 초만 해도 경력출신 임원비율이 20%안팎에 불과했지만 인사정책이 순혈주의(純血主義)에서 혼혈주의(混血主義)로 바뀌면서 외부영입 케이스가 크게 늘고 있다.
연령별로는 △40대가 67%로 가장 많고 △50대 30% △30대 2% △60대 1%의 순. 해외에서 공부한 해외파는 15%에 이른다.
지역별로는 영남출신이 많다. 삼성이 영남을 기반으로 출발한 기업인 데다 60, 70년대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주력공장이 이 지역에 집중적으로 들어선 점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현재 24개 계열사 사장단 41명의 출생지는 부산 대구 경남북 등 영남권이 23명으로 절반을 넘는다. 이 밖에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 7명, 대전 충남북 등 충청권이 8명, 광주 전남북 등 호남권 3명이다.박원재기자 parkwj@donga.com
삼성의 엔지니어 출신 주요 경영인 | |||||
회사 | 현재 직위 | 이름 | 나이 | 학력 | 출신지 |
삼성전자 | 대표이사 부회장 | 윤종용 | 58 | 경북사대부고, 서울대 전자공학 | 경북 영천 |
대표이사 사장 | 이윤우 | 56 | 경북고, 서울대 전자공학 | 경북 월성 | |
대표이사 사장 | 진대제 | 50 | 경기고, 서울대 전자공학 | 경남 의령 | |
사장 | 이기태 | 54 | 보문고, 인하대 전기공학 | 대전 | |
사장 | 임형규 | 49 | 경남고, 서울대 전자공학 | 서울 | |
사장 | 이상완 | 52 | 서울고, 한양대 전자공학 | 서울 | |
사장 | 황창규 | 49 | 부산고, 서울대 전기공학 | 부산 | |
삼성SDS | 대표이사 사장 | 김홍기 | 55 | 서울사대부고, 서울대 상학 | 서울 |
삼성종합화학 | 대표이사 사장 | 고홍식 | 55 | 광주일고, 한양대 기계공학 | 전남 고흥 |
삼성정밀화학 | 대표이사 사장 | 박수웅 | 58 | 경남고, 부산대 화학공학 | 경남 고성 |
종합기술원 | 사장 | 손 욱 | 57 | 경기고, 서울대 기계공학 | 경남 밀양 |
삼성전기 | 사장대우 | 강호문 | 52 | 서울고, 서울대 전기공학 | 경기 부천 |
삼성SDI | 부사장 | 배철한 | 50 | 대륜고, 경북대 응용화학 | 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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