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현 사장단의 면면을 보면 재무와 기획을 양대 축으로 형성돼온 경영인맥 구도가 최근 들어 재무와 영업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 삼성은 수치에 밝고 치밀한 재무통이 전통적으로 강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자동차사업의 진출 여부를 놓고 그룹 내에서 격론이 벌어졌을 때 재무통은 “소심하다” “진취적이지 못하다”는 역공을 받았고 기획통이 득세했다.
자동차사업 실패와 1997년 말 외환위기는 역설적으로 재무통의 진가를 재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묵묵히 현장을 파고들며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키워온 영업통들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삼성경영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재무통 인맥 잇는 금융 최고경영자(CEO)〓삼성 고위관계자는 “올해 사장단 인사에서 금융계열사 사장이 전원 유임된 것은 실적에 대한 평가라는 측면과 함께 재무통의 입지강화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의 재무 인맥이 배출한 CEO로는 삼성증권 황영기(黃永基) 사장, 삼성생명 유석렬(柳錫烈) 사장, 삼성카드 이경우(李庚雨) 사장, 삼성투신운용 배호원(裵昊元) 사장, 삼성캐피탈 제진훈(諸振勳) 사장, 삼성벤처투자 이재환(李在桓) 사장 등을 꼽을 수 있다.
황영기 사장은 금융시장이 인정하는 핵심 인사이지만 요즘은 자신의 존재가 지나치게 부각되는 데 대해 부담스러워한다는 후문.
비서실 재무팀 출신인 배 사장은 비슷한 연배의 황 사장으로부터 삼성생명 투자본부장과 삼성투신운용 사장을 차례로 넘겨받았다. 두 사람의 ‘자리 주고받기’ 인연이 삼성증권 사장까지 이어질지가 금융계의 관심사. 계수에 밝고 업무처리가 정교하며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기를 즐긴다.
자동차와 증권의 부사장을 지낸 이경우 사장은 외형보다 내실을 중시하는 스타일. 97년 삼성카드 사장 취임 직후 부실채권을 줄이기 위해 연간 3조원의 매출을 포기하면서 상습연체자 30만명을 정리했다. 배 사장의 고교 3년 선배로 관계에도 발이 넓다.
제진훈 사장과 이재환 사장은 삼성의 ‘출세 코스’인 제일모직 경리과와 비서실을 거친 공통점이 있다. 대출전용카드 등 신상품을 내놓아 할부금융업계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제 사장은 유석렬 사장과 입사 동기다.
▽실무에 정통한 영업통 CEO〓그룹 비서실을 거치지 않고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영업통도 비서실 재무인맥 못지않게 중용되고 있다. 삼성생명 배정충(裵正忠) 사장과 삼성화재 이수창(李水彰) 사장은 금융 부문의 ‘현장파 인맥’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힌다.
배정충 사장의 이력서는 단출하다. 1969년 삼성생명의 전신인 동방생명에 입사한 뒤 삼성화재에서 전무와 부사장으로 4년간 일한 것을 포함해 30년 넘게 보험업계를 지켜왔다.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과는 고려대 상대 65학번 동기로 그룹 내 호남인맥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이수창 사장은 중앙개발(현 에버랜드) 제일제당 삼성중공업 삼성생명 삼성화재 등의 영업전선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현장에 있다”는 소신을 갖고 있는 현장중시파. 90년대 중반 삼성화재의 경인본부장을 맡아 업계 4위였던 시장점유율을 1년 만에 1위로 끌어올릴 정도로 추진력이 강하다.
영업에 강한 CEO는 비(非) 금융분야에서도 기복 없이 우대받고 있다.
삼성석유화학 최성래(崔成來) 사장은 삼성물산 시장개척담당 이사와 삼성 유럽본부 대표 등으로 일하면서 수출현장을 누빈 무역전문가. 해외지점장 시절에는 나이지리아와의 국교수립, 런던 대영박물관의 한국 전시공간 확충 등 외교정책을 뒷받침하는 역할도 했다.
물산 건설 등의 해외파트에서 일했던 삼성엔지니어링 양인모(梁仁模) 사장은 서울 상암동 월드컵 주경기장 건설수주 경쟁에서 현대건설 컨소시엄을 누르고 공사를 따냈다.
일본 본사 정준명(鄭埈明) 사장은 과장 시절부터 일본 근무를 시작한 그룹의 대표적인 일본 전문가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전관(현 삼성SDI) 등 전자 계열사를 두루 거쳐 전자산업의 흐름을 보는 시야가 넓다는 평.
▽각론에 강한 부문별 전문가 그룹〓삼성물산 이상대(李相大) 사장은 1978년 삼성종합건설로 옮긴 뒤 건설 외길을 걸어온 그룹의 건설통이다. 주택 부문 사장으로 일하면서 아파트 브랜드 ‘래미안’을 히트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초 주택 건설부문의 통합 CEO로 선임됐다.
원대연(元大淵) 제일모직 패션 부문 사장은 삼성 근무를 삼성물산 봉제수출과에서 시작해 직장생활의 대부분을 의류와 씨름했다. 1980년대 중반 적자에 허덕이던 에스에스패션을 흑자로 전환시켰고 요즘은 빈폴 등 국산 의류브랜드의 고급화에 주력하고 있다.
삼성에버랜드 허태학(許泰鶴) 사장은 입사 이후 33년째 신라호텔과 에버랜드를 떠난 적이 없는 서비스 레저 부문의 간판 경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서비스만이 고객을 감동시킨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박원재기자 parkwj@donga.com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박정훈기자 sunshade@donga.com
삼성 금융계열사의 주요 CEO | ||||
회사 | 이름 | 나이 | 학력 | 출신지 |
삼성생명 | 배정충 | 57 | 전주고, 고려대 경영학 | 전북 전주 |
삼성화재 | 이수창 | 54 | 대창고, 서울대 수의학 | 경북 예천 |
삼성카드 | 이경우 | 56 | 경남고, 부산대 경제학 | 경북 청도 |
삼성투신운용 | 배호원 | 52 | 경남고, 연세대 경영학 | 경남 함양 |
삼성캐피탈 | 제진훈 | 55 | 진주고, 부산대 경영학 | 경남 산청 |
삼성의 전문가형 CEO | ||||
회사 | 이름 | 나이 | 학력 | 출신지 |
삼성물산 | 이상대 | 55 | 경복고, 고려대 정치외교 | 서울 |
제일모직 | 원대연 | 56 | 동아고, 고려대 철학 | 경남 의령 |
삼성에버랜드 | 허태학 | 58 | 진주농림고, 경상대 농학 | 경남 고성 |
▼'삼성사관학교' 추신 타기업 옮겨도 두각
젊은 시절, 삼성에서 훈련받은 엘리트들은 그룹 울타리를 벗어나 다른 기업에 가서도 최고경영자(CEO)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재계에서 활약 중인 ‘삼성 OB’ 기업인은 크게 비서실과 삼성물산 출신으로 나뉜다.
비서실 출신 CEO로는 구학서(具學書) 신세계백화점 사장, 홍성일(洪性一) 한국투자신탁증권 사장, 이명환(李明煥) ㈜동부 사장, 조영철(趙泳徹) CJ39쇼핑 사장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병철(李秉喆) 창업주 시절 비서팀장으로 일했던 구 사장은 삼천리그룹 부사장으로 갔다가 신세계 이명희(李明熙) 회장에게 발탁됐다. 할인점인 이마트를 설립해 회사의 외형을 키우는 데도 성공했지만 재무통답게 내실을 다지는 데도 열성이다.
비서실 감사팀장을 5년간 맡았던 홍 사장은 삼성중공업 삼성증권 등을 거쳐 공무원이 아닌 민간 CEO로는 처음으로 한국투신 사장이 된 케이스. 2000년 취임 당시 8000억원에 달했던 자기자본 잠식 규모를 3000억원으로 줄이는 등 경영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비서실 재무팀 출신인 이 사장은 인사관리 관련 저서도 낸 적이 있을 정도로 학구적이다. 동부그룹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조 사장은 비서실 인사팀장으로 일하면서 ‘노조 없는 삼성’의 전통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 제일제당 이재현(李在賢) 부회장에게 스카우트돼 CJ39쇼핑 사장으로 옮겼다.
김재우(金在祐) 벽산 사장과 조충환(曺忠煥) 한국타이어 사장은 삼성물산 출신. 김 사장은 벽산의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구조조정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서울보증보험의 박해춘(朴海春) 사장도 삼성화재에서 잔뼈가 굵은 ‘삼성맨’이다. 현재 공적자금을 받은 서울보증보험의 변신을 진두 지휘하고 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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