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업체의 A상무는 “임원이 되는 날로 정년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고 말한다. 명절 때면 일가 친척들이 보내는 선망의 시선에 뿌듯한 마음도 들지만 이것도 잠시. 임원 승진 후 3, 4년도 채 안 돼 옷을 벗은 동료나 선배를 떠올리면 은퇴를 대비해야 할 때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내로라 하는 대기업의 B상무는 올해 보직이 바뀐 이후 조직 장악에 애를 먹고 있다. 고참 부장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아서다. 언제부터인가 고참 부장들 사이에는 ‘임원은 임시직이므로 회사를 나가도 임원이 먼저 나간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그는 “솔직히 나도 부장 때 그랬다”며 “솔선수범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씁쓸해했다.
임원들은 예전 같지 않은 건강상태에도 불안을 느낀다. 몇 년 전 임원승진 때문에 암에 걸린 사실을 쉬쉬하다 숨진 어느 기업 부장의 얘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 해마다 받는 건강검진도 전혀 달갑지 않다. 부하 직원들은 “대장검사다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이다 해서 몇 백만원짜리 검사를 받아서 좋겠다”고 하지만 임원들의 눈에는 ‘회사 밖으로 쫓아낼 구실을 찾기 위한 테스트’로 비친다.
“건강진단이 두렵다. 혹시 재검 판정이라도 나올까봐 건강진단 철이 되면 몇 주 전부터 몸 관리에 돌입한다.” 올 들어 체력 문제로 보약을 먹기 시작했다는 전자업체의 C이사. 요즘 들어 부쩍 술자리가 부담스러워진 그는 양주를 물 컵에 섞어 마시다가 적당히 기회를 봐서 버리는 주법(酒法)을 애용하고 있다.
이동통신업체의 D상무는 얼마 전 불쑥 사표를 던져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장의 신임도 두터워 이른바 ‘잘 나가는 임원’의 한 사람이었던 그가 회사를 그만둔 것은 정점(頂點)에 있을 때 새 길을 찾겠다는 판단 때문. 그는 “현 위치에서 안주하느니 한 등급 낮은 회사로 옮겨 최고경영자(CEO) 경험을 빨리 쌓는 것이 경력관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매년 실적을 평가받는 임원이 되면서 자신과의 싸움이 더욱 치열해졌다. 과장 부장 시절 임원들 방에 가면 혼자 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 요즘의 내가 꼭 그렇다.” ‘10년 말술’로 대장질환에 시달리는 E이사는 올 들어 1년짜리 주말반 경영학석사(MBA) 과정에 매달리고 있다. 학위가 탐나서라기보다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속의 불안감을 달랠 방법이 없어서다.
김태한기자 freewi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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