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의 각에 맞게 포장지를 척척 접어 넣고, 이음새가 보이지 않도록 양면 테이프로 붙인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5초. 긴 리본용 띠를 가로 세로로 휙휙 두르고, 또 다른 리본을 배배 꼬는가 싶더니 어느 틈에 차분하지만 풍성해 보이는 리본 꽃이 됐다. 녹은 실리콘을 사용해 구슬 장식과 리본 꽃을 살짝 붙여준다. 총 걸린 시간은 5분.
신세계백화점 서울 본점 선물 포장코너의 ‘포장 도사’ 황종구씨(42)는 선물 포장 경력 23년째다. 79년 신세계 본점 선물코너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단골손님도 ‘꽤’ 된다. 강남 지역에도 백화점이 많이 들어섰지만 굳이 남산터널의 혼잡통행료와 왕복 2시간을 써가며 황씨에게 선물 포장을 맡기러 오기도 한다. 선물 포장의 가격은 1만원선부터 5만원대가 넘는 것까지 다양.
크리스마스 직전 등 대목에는 하루에 300개씩 선물을 포장한다. 2월 밸런타인데이와 5월 가정의 달도 ‘시즌’이다. 하루에 9시간씩 일하고 점심은 15분 이상 먹지 못한다.
▽23년간 산타할아버지 비슷한 일을 했네요〓79년에도 백화점에는 선물 포장코너가 따로 있었다. 셀로판테이프로 붙여 포장지를 싸고 별 리본을 달아주는 정도였지만 당시 포장비가 1500원이나 했다.
리본 천으로 다양한 형태의 리본을 직접 만들어 붙이는 포장은 87년경부터 활성화됐다. 황씨는 15년 전 일본을 6차례 방문해 리본 제작법을 배웠다. 당시 일본은 전문 ‘기프트 숍’이 생겨나면서 선물 포장 서비스가 붐을 이루던 때였다.
황씨는 현재 200여개의 리본 디자인을 번갈아 사용한다. 단골 손님에게 매번 같은 스타일로 포장해 줄 수는 없기 때문에 매년 새로운 리본 형태를 개발해야 한다.
“선물 포장에도 ‘패션’ 개념이 많이 도입됐어요. 유행도 있고…. 예전에는 나이 드신 분들 선물용으로는 가라앉고 우중충한 색을 썼지만 최근에는 화려한 톤으로 가는 경향이 있죠. 젊은 층은 흰 컬러를 선호해요. 선물에 흰 리본을 다는 것은 금기였지만 요즘은 유행이죠.”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10년 전 어느 기업체의 부탁을 받고 3500개의 카세트 플레이어를 오후 3시부터 다음날 오후 2시까지 포장했다. 총 물량을 실어보니 트럭 10대분. 이 때 손과 몸의 상태는 말 그대로 ‘맛이 간’ 상태였다는 것이 황씨의 회상.
“한 번은 손님이 검은 비닐 봉지를 내밀면서 내용물은 절대 보지 말고 포장하라는 겁니다. 잘못해서 봉지에 작은 구멍이 뚫렸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피가 나오는 겁니다. 기겁을 했죠. 알고 보니 부모님 건강식으로 개고기를 선물하려는 사람이었어요. 예쁜 상자에 고운 리본으로 개고기를 포장했죠.”
▽이런 것까지 생각해야죠〓“선물 내용물의 색과 포장지 색을 맞춰주는 게 중요해요.”
어차피 포장하면 내용물은 보이지 않는데, 왜 내용물과 포장지 색을 맞춰야 하는 걸까.
“와인색 포장지를 보면 눈이 와인색에 익숙해지죠. 포장을 끌렀더니 초록색 옷이 나왔다면 눈이 포장색에 미리 교란돼 정작 선물 색이 눈에 잘 안들어오게 되거든요.”
리본의 색은 물론 포장지 색과 조화돼야 한다.
어른께 드리는 선물은 사각 상자에 담아 리본 장식을 하는 게 예의다. 최근에는 헝겊이나 비닐 소재로 사탕 형태, 병 형태 등으로 포장하기도 하지만 친구끼리라면 몰라도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드릴 선물에는 격식이 맞지 않는다. 메시지를 함께 전할 때는 카드를 리본 밑에 끼워 선물보다 카드를 먼저 읽을 수 있게 한다.
상자 속의 빈 공간은 솜으로 채우는 것이 좋다. 색 창호지 등을 잘게 잘라서 쓰기도 하지만 솜보다 탄력이 떨어져 막상 끌렀을 때 종이는 뭉쳐져 있고 선물은 한쪽으로 쏠리게 된다.
리본의 매듭 묶는 방법을 따로 개발한 것도 받는 사람을 생각하는 황씨의 노하우. 황씨가 묶는 리본은 딱 한번만 잡아당기면 쉽게 풀어진다. 철사를 이용한 매듭도 쓰지 않는다.
“선물을 받았는데 잘 끌러지지 않아 고생하며 시간을 버리다가 결국 가위로 자르는 경우가 많죠. 주고 받는 감동과 기쁨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을 방해하게 돼요.”
▽선물이 정말 선물 같아져서 좋아요〓“계속 선물포장 할 거예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황씨의 대답은 간단하다. 문화센터나 학원 등에서 선물 포장 강사 자리를 제안해 오기도 하지만 거절하는 중이다. 1주일만 안 해도 손이 굳는데, 아예 선물 가게를 창업할 사람이 아니라면 취미로 선물 포장을 배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
“내용물 만큼이나 포장에 점점 신경을 쓰는 추세죠. 받을 때 훨씬 기분 좋게 해주니까요.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주는 사람은 더 기뻐질 테니까 ‘부가가치’를 많이 높이는 일 아닌가요?”
어차피 버리게 될 포장에 만원 단위가 넘는 돈을 써가며 화려한 포장을 하는 것은 거품이 아니냐는 질문에 황씨는 이렇게 답하더니 포장 재활용법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포장을 버리다뇨. 상자는 수납용으로 쓰면 좋고, 리본은 커튼 묶는 데 쓰거나, 한번 살짝 다려서 다시 포장에 사용하고….”
김승진 기자 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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