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화나 엔화에 대한 달러화의 가치가 1월에 비해 10% 이상 떨어졌으며 요 며칠간은 폭락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이는 미국의 경기회복이 불확실한 데다 올해 경상수지 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5%에 이를 것으로 보이는 등 강한 달러 정책을 마냥 고수하기가 힘들게 된 데 따른 것. 엔론 사태 등 회계불투명 문제로 미국으로 유입되는 해외투자가 줄어드는 것도 한 요인이다.
지난 10여년간 미국은 달러 강세가 마치 미국 경제의 자존심인 듯이 여겼다. 경제학 교과서에는 ‘지속적인 통화강세는 수출부진으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를 유발해 나라경제에 부담을 준다’고 쓰여있지만 미국만은 예외인 듯 행동한 것이다.
즉 ‘미국 경제가 워낙 효율적이고 투자수익률이 높다보니 주변부 자본이 중심부(미국)로 역류(逆流)하면서 달러 강세 현상이 나타난다’는 설명으로 무역수지 적자가 마치 대외 경쟁력의 증거인 것처럼 받아들인 것. 이른바 ‘신경제(New Economy)론’이었다. 미국은 2000년에 전 세계 자본투자의 64%를 흡인했다.
하지만 요즘 미국의 경제지표가 기대에 못 미치면서 신경제론이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 이에 대해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그동안 호황을 누렸던 미국과 상대적으로 침체했던 기타 지역 간의 경제력의 조정 과정”이라며 “그런 측면에서 세계 경제 전체로는 좋은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달러 약세는 원화 강세와 동의어다. 원화 가치가 오르면 수입물가는 떨어지지만 수출업체에는 부담을 주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라도 원화 가치를 낮춰 달라’는 볼멘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의 달러 약세는 박승 총재의 지적대로 세계 경제의 거대한 흐름이 바뀌면서 생긴 현상으로 한국 정부가 주무를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물론 달러 약세는 국제자본이 개발도상국으로 환류하는(빅 푸시·big push) 계기로 작용해 우리 정부로서는 해외부문에서 발생하는 과잉유동성을 관리해야 하는 추가과제를 떠안는다.
개별기업도 불평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고 생존할 것인지를 연구해야 할 시기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달러당 800원대 이하의 환율에서도 수십년간 살아온 경험이 있다.
잠깐 나라 밖 표정을 살펴보자. 달러 약세라는 동일한 현상을 놓고 유럽은 대미 경쟁력이 강해졌다며 웃고 있는 반면 일본은 장기불황의 터널을 막 빠져나오려는 순간 엔화 강세에 발목이 잡혔다며 울상이라는 소식이다.
아르헨티나 페소화의 가치가 연초에 비해 4분의 1로 폭락하는 등 금융위기로 인한 통화절하에 시달리는 중남미는 한국 등의 절상을 몹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각자의 준비에 따라 똑같은 현상이 어떻게 달리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허승호 경제부 차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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