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전농림부장관이 보내온 전문

  • 입력 2002년 7월 20일 18시 52분


한중 마늘협상 파동의 교훈

제가 부재중에 뱅쿠버 UBC의 제 숙소로 기자님들께서 한 두 번씩 전화를 주셨다는데 통화하지 못하여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접하고 인터넷을 통해 국내에서 일어난 "마늘 협상" 관련기사들을 읽었습니다.

평소 "그 자리를 떠나 있을 때는 그 자리의 정사를 논하지 말라. (不在位 不謀其政)" 라는 성현들의 말씀을 따르고자 했던 저로서는 한 때 통화가 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농림부의 徐圭龍차관 (협상당시 차관보)이 책임의 일단을 지고 물러났다는 소식과 더불어, 오보에 해당하는 일방적 "카더라" 식의 기사가 사실을 왜곡, 전국의 마늘농민들과 뜻있는 국민들을 분노 내지는 실망시킬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 기억과 양식을 총동원하여 2000년 6~7월 사이의 "한중 마늘협상" 관련 정부대책과 2000년 8월7일 본인이 장관직을 그만둘 때까지의 기억을 되살려 그 전후사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알려드리는 것이 정당한 도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구체적인 날짜와 숫자 등은 당시 국내 마늘대책을 주관하면서 세차례의 관계장관회의 때 배석했던 소만호 국장 (현 농정국장)에게 확인하여 정정 보완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제 기억으로는 6월과 7월 사이 마늘협상 시작 전과 도중에 관계장관회의가 재경부장관 주재하에 세차례 열렸는데, 그 어느 회의때도 "세이프가드 연장 불가 방침"은 논의돤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회의에 상정된 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관계장관회의에서 김성훈 전농림부 장관의 동의 아래 그 방침이 결정됐다"는 ○○일보 ○○○ 기자의 외통부 관계관 인용기사(2002. 7.18)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 주요 토의 결정내용은 소만호 국장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2) 북경에서의 마늘협상이 진행되면서 타결될 듯 하다가는 다시 새로운 요구를 제기하는 중국측의 눈덩이식 협상태도에 대하여 관계장관회의에서 당시 농림부장관은 우리 대표단의 철수를 주장한 바 있었으며, 그중 한번은 계속된 수입물량 증대요구와 국영무역의 비율을 삭감하려는 중국측의 요구 등에 대하여 더 이상 양보해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담당국장을 대동, 퇴장한 바도 있습니다.

3) 북경에서 개최된 한중 마늘협상에 농림부 채소특작과장(권은오)을 5명의 우리 정부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시키고 있던 농림부가 세이프가드 관련 논의를 어렴풋이 포착한 것은 7월초 북경 우리측 대표로부터 의견조회가 왔을 때입니다. 중국측 요구에 대해 농림부 차관 명의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하여 합의서에 농림부 의견이 반영됐다는 사실을 구두 보고 받은 바 있습니다.

4) 그 다음으로는 7월15일 경(?) 외통부 통상교섭본부를 통해 전달받은 협상타결 결과요약보고 Fax 맨 끝부분에 '2003년부터는 세이프가드 이전처럼 민간기업이 자유로이 마늘을 수입할 수 있다'는 내용의 표현이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야 확실히 알게 됐는데, 그 때 담당국장이나 차관보, 등은그 부분을 통상적인 세이프가드 조치가 풀린 후의 정상적인 교역 상황을 서술한 것으로 이해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외통부의 그 누구도 이 문구가 "세이프가드 연장불가"를 뜻하는 것이라고 미리 말해준 바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 차관에게 구체적으로 이 조항을 부연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5) 따라서 이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최종 협상타결 당시 이같은 내용을 담은 문건이 우리측 협상대표(최종화 대사)의 서한(Letter) 형식으로 중국측에 교부됐다는 내막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그 서한의 문구가 어떻게 쓰여 있는지, 그리고 그 서한이 통상외교상 어떤 효력을 갖는지, 또 그것이 부속문서인지 아닌지 여부를 농림부로서는 현재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6)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협상종료 후 관계장관회의가 없어 외통부 통상교섭본부장으로부터 그 내용을 직접 보고 받을 기회가 없었으며, 다만 8월1일의 협상주무기관인 외통부 통상교섭본부가 발표한 보도문건, 8월4일 농림부를 비롯한 관련 부처에 정식으로 통보된 외통부의 협상결과내용 공문, 그리고 외통부의 대국회 보고문건 어디에도 "세이프가드 연장불가"를 양측이 합의했다는 설명이 없었습니다. 협상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농림부 채소특작과장의 출장복명서에도 그러한 내용이 보고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7) 그러면 이 사건이 맨처음 터졌을 때 세이프가드 연장불가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말했던 농림부가 왜 다시 입장을 바꾸어 서규룡 차관 이름으로 "농림부도 알고 있었다"라고 번복했는가 입니다. 그것은 한정부내에서 부처들이 각기 따로 따로 중요한 국사를 서로 협의하지 않은 것으로 비춰지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사료됩니다.

8)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세가지 입니다.

그 첫째는, 정치권과 농업계가 당연히 문제삼는 누가 "세이프가드 연장불가"를 합의하도록 지시했으며, 협상이 끝난 다음에라도 왜 그 사실을 미리 밝히지 않았는가 입니다.

둘째, 회담 대표의 Letter의 내용과 그 편지에 담긴 정확한 문구의 표현이 무엇이며, 과연 세이프가드 연장불가를 명시했는가 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Letter가 같은 통상협상 상의 셩격과 의무가 무엇인가 입니다. 아직도 그 서한에 담긴 내용이 과연 세이프가드 연장불가를 명시했는가는 분명치 않습니다.

셋째, 이제 중국이 WTO 회원국이 된 이상, 앞으로 또다시 마늘에 대해 세이프가드 발동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 앞서의 Letter가 어떻게 얼마나 효력을 발생할 것이며, 그렇더라도 2000년 6월 때처럼 무지막지하게 WTO 규범과 관례에 벗어난 방식(농산물인 마늘무역에서 발생했던 특별긴급관세조치를 수입공산물에 대해 몇십배로 일방적으로 보복했던 방식)으로 보복할 수 있느냐 입니다. 특히 후자 두 문제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국제규범 및 사례 검토가 국익차원에서 즉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첫 번째 사항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설명한 협상과정과 의사결정 과정을 검토해 볼 때, 과연 농림부 서규룡 차관이 이 일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는지에 대해 이유가 불분명합니다. 다만 행정적인 책임은 없지만,도덕적으로 분노한 농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조처라면, 그 보다도 사실을 더 정확히 설명하고 그 후속대책으로서 앞서 말한 후자 두 문제에 대한 대응책 및 농가소득보장조치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당시 마늘협상이 타결되고 후속대책(마늘농가 소득보장 대책)을 마련한 다음 2000년 8월7일 물러난 저 역시 더 면밀히 협상내용을 살펴보지 못하고 국내농가 구제대책에만 골몰했던 점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9) 제 소견으로는 이번 마늘 세이프가드 파동이 앞으로 WTO 제2라운드와 2004년 쌀 재협상, 그리고 칠레와의 FTA, 아펙통상협상 등 중요한 협상의제를 앞두고 유사 사태의 재발을 막는데 우리에게 값비싼 교훈을 주었다고 봅니다.

그 첫째는 무릇 특정품목, 특정문제의 통상협상에는 해당부처에게 협상 주도권(대표)을 주어 책임을 갖고 하도록 해야 전문성과 국내문제와의 연계성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즉, 협상권을 각부처에 분산시켜 대응케 해야 수세적 통상외교의 경우 실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로는, 통상협상 문제에 관한한 담당자의 잦은 인사교체와 특히 순환보직제를 가급적 배제하여 일관성과 전문성이 유지되도록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정부 들어서도 통상교섭본부를 비롯하여 각 부처 통상담당관들이 UR 때와 비슷하게 너무 자주 바뀌고 있지 않나 의구심이 듭니다.

셋째, 모든 통상협상 과정과 협상 결과에 대하여는 국익에 크게 배치되지 않는 한 그때 그때 공개적으로 국내외 의견을 수렴하여 투명성과 국민적 합의를 확보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국민여론과 국회의 뒷받침이 없는 협상은 도덕적으로 너무 취약하여 이번 마늘사태와 같은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날 가능성이 큽니다.

끝으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부조직법을 개정하여 외교통상부 내에 통상교섭본부를 두고 통상협상의 전권을 한 곳에 몰아 준 것은 우리나라처럼 수세적인 통상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는 득 보다 실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처럼 공세적인 통상외교를 펴는 나라의 경우 USTR(무역대표부)이 대통령 직속하에서 국익증대를 위해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와 같이 수세적인 협상을 더 많이 해야하는 경우는 통상'교섭'본부의 역할보다는 통상'중계'본부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하거나 전문성이 결여된 순환보직제로 인해 그 폐단이 막대한 국익손실로 연결될 개연성이 크다는 점도 유념하여야 합니다.

복잡하고 긴 내용을 축약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내용에 불비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불찰 내지 무지 때문이라는 사실을 양해하시어 농림부에 보완을 부탁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2년 7월 19일

캐나다 뱅쿠버 UBC 학사에서

김성훈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