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제’는 91년부터 무려 10년 가까이 계속된 미국경제의 유례 없는 장기호황을 기존의 경제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만들어낸 가설이다.
정보기술(IT) 부문의 기술혁신, 전세계 자본의 자유로운 투자가 가능한 환경, 기업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시스템이 맞물려 미국경제는 기존의 경기 사이클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기간 미국은 높은 경제성장률,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 낮은 실업률, 물가안정을 모두 이루었다.
그러나 장기호황이 막을 내리고 지난해 말부터 터지기 시작한 미국기업들의 잇단 회계부정 사태는 미국식 ‘신경제’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작년 12월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난 엔론을 시작으로 올 들어서는 무려 50억달러 규모의 회계장부 조작 혐의를 받은 월드컴을 비롯해 K마트, 컴퓨터 어소시에이트(CA), 제록스, 퀘스트 커뮤니케이션, AOL타임워너 등 20여개의 간판급 기업들이 속속 조사 대상에 올랐다.
문제는 이런 회계부정이 일개 기업에 국한된 돌발사태가 아니라 구조적인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벌써부터 ‘신경제’의 종말을 확인하는 현상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이 누려온 10년 간의 ‘거품 잔치’의 결과라는 분석도 나왔다. 신경제는 허상이요 거품이었다는 것이다.
신경제의 전제조건 중 하나였던 미국이 자랑하던 시장의 투명성은 이번 사태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도 장부조작으로 매출을 늘렸다면 거짓이었던 셈이다.
이런 지적의 옳고 그름은 아직 판단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번 사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올 상반기에만 25개 상장 등록 기업의 분식회계 사실이 적발됐다.
미국 상원은 15일 기업 회계에 대한 규제를 대폭 강화한 ‘사베인스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미국이 규제완화를 ‘세계화’의 핵심 내용 중 하나로 전도해온 점에 비춰볼 때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앨런 그린스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16일 상원 증언에서 “90년대 말에는 증시활황에 따른 ‘탐욕’이 전염병처럼 재계를 뒤흔들었다”고 ‘거품론’을 인정했다.
그러나 “광풍(狂風)이 지나갔으므로 기업 비리는 점차 감소할 것”이라는 그의 희망섞인예언이 맞을지는 알 수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간의 탐욕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출발한다. 이 탐욕이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장치를 얼마나 잘 구축해 놓느냐에 따라 그린스펀의 예언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을 것이다.
회계부정이 일상화된 것으로 알려진 한국이 이번 사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김상영 경제부차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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