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정주영(鄭周永)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썩은 정치를 바로잡겠다”며 대권에 도전했다. 대선 과정에서 현대 계열사 돈을 쓰는가 하면 유세 때 현대 계열사 임직원은 물론 협력업체 직원들까지 동원했다.
도전에 실패한 뒤 현대에는 모진 시련이 닥쳤다. 세무조사를 받으며 정 회장은 물론 측근 임원이 줄줄이 법정에 섰고 현대그룹은 몇 년간 금융제재를 받았다. 일부 현대 임직원들은 “대선에 뛰어든 탓에 삼성에 밀리기 시작했다”고 억울해 한다.
10년 뒤인 지금은 상황이 판이하다. 이른바 ‘왕자의 난’을 치르면서 정몽구(鄭夢九) 현대기아차 회장,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회장, 정 의원 등 3형제의 기업들이 계열분리됐다. 정 의원이 현대차나 현대상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지렛대가 없어진 것.
무엇보다도 소수주주와 기관투자가들의 입김이 세졌다. 우리증권 이종승 기업분석팀장은 “정 의원이 중공업을 선거판에 끌어들이려 하다가는 외국인 투자자나 개인투자자, 참여연대 등으로부터 손해배상소송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형제그룹에 불똥이 튈 가능성은 있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현대차는 최근 정몽구 회장이 세계박람회 유치활동 이외에는 대외활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언론접촉이나 사외 행사 참석도 자제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권오갑 상무도 “정 의원이 중공업의 돈과 직원은 절대 선거에 동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 의원이 대선에 뛰어든다면 측근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선거운동을 할 가능성까지 무시하긴 어려울 것으로 재계는 관측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대 계열사들은 정치바람에 대한 ‘방화벽 쌓기’에 여념이 없다. 중공업의 한 관계자는 “정 의원의 출마문제와 관련해 입조심하라는 특별지시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