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이 돈을 송금한 시기로 알려진 2000년 6월은 회사가 심각한 자금난에 몰렸을 때였다. 그 해 3월부터 시작된 현대그룹 ‘왕자의 난’은 현대 계열사에 치명적인 상처를 줬다.
현대그룹이 시장의 신뢰를 잃자 제2금융권은 현대에 빌려줬던 돈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현대상선도 4, 5월에 4151억원이나 회수당했다. 이런 와중에도 현대상선은 5월 말 현대아산에 증자를 통해 560억원을 지원해줬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현대아산과 다른 계열사를 지원하느라 극심한 자금부족에 빠진 현대상선은 결국 은행에 ‘SOS’를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지원된 긴급자금 4000억원의 내용은 △기업어음(CP) 상환 1740억원 △선박용선료 1500억원 △선박건조대금 상환 590억원 △회사채상환 1780억원 등이었다. 이어 6월에 다시 운영자금으로 900억원을 지원했다.
총여신액이 2600억원이던 현대상선에 한꺼번에 4900억원이 지원된 데 대해 금융권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액수”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하나 이상한 점은 당시 현대상선의 주거래은행은 외환은행이었는데도 외환은행을 제쳐둔 채 산업은행 단독으로 4900억원을 대출해줬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산업은행은 현대상선이 정상적인 기업이라는 이유로 자금의 사용처를 확인하지 않았다.
산업은행 박상배(朴相培) 부총재는 “대우그룹이 한창 어려웠는데 현대상선마저 망하면 한국경제는 끝난다고 생각해 지원했다”고 말했다. 현대상선은 그 해 9, 10월에 일단 1700억원을 갚았다.
이러한 정황에 당시 시중에 현대그룹의 대북지원설이 파다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할 때 두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첫째는 현대상선이 대북사업을 위한 비자금을 조성해 놓았다가 금융권이 갑자기 자금을 회수하는 바람에 미스매칭(만기 불일치)이 생기자 산업은행 돈을 빌려 북한에 송금한 뒤 나중에 비자금으로 1700억원을 갚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둘째는 자금난에 빠진 현대상선이 정몽헌(鄭夢憲) 회장과 마찰을 빚을 정도로 현대아산에 대한 지원을 꺼렸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정부가 대북사업의 대가로 현대상선에 자금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