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계좌추적권을 가진 금융감독원은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이 사안에 대해 계좌를 추적하면 금융실명거래법을 위반하는 ‘범법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금융실명법에는 △내부자 거래 및 불공정거래 행위 조사 △금융사고 조사 △불건전 금융거래 조사 △금융실명법 위반 및 부외(簿外·장부 외)거래 조사 등에 필요한 경우 금감원장이 금융기관에 거래 정보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현대상선의 분식회계 사실이 명백히 드러남에 따라 금감원이 계좌추적을 더 이상 거부할 명분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많다.
이와 관련해 박지원(朴智元) 대통령비서실장은 1일 ‘4억달러 대북 비밀지원설’의 진상 규명을 위한 금융계좌 추적 문제에 대해 “법적인 근거도 없는 계좌추적이나 장부공개는 안 되는 일”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금감원의 버티기〓금감원의 고위간부는 “한나라당이 계좌추적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법을 만드는 사람이 스스로 ‘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금감원의 ‘법대로’ 방침과는 다른 해석도 많다. 일부 회계전문가들은 “금융당국이 과거에도 ‘법대로’만 따지며 계좌추적을 했지는 의문”이라며 “정치적 의혹이 걸린 사안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확인 의지이며 계좌추적은 필요하다고 본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금감원이 현대상선에 돈을 꿔준 산업은행에 특별검사를 실시하면 특검 과정에서 돈의 흐름을 파악하는 ‘우회적인 계좌추적’도 가능하다.
이에 대해 금감원은 “산업은행에 대한 1차 감독권은 감사원에 있다”면서 “감사원이 14일 산업은행에 대한 감사를 실시할 예정인 만큼 금감원이 직접 특검을 실시할 계획은 없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현대상선이 2000년 6월 반기보고서에서 당좌대출금 3000억원을 부채로 기록하지 않는 분식회계를 했던 사실이 2일 확인돼 금감원의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을 잃게 됐다.
▽검찰이 계좌추적 할 수도〓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이 혐의내용을 검찰에 고발하면 검찰 수사 과정에서 계좌추적이 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
경실련 고계현 정책실장은 “계좌추적은 신중해야 하지만 사안이 워낙 크고 정치권에서 의혹을 제기한 만큼 검찰고발을 통해 의문점을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에서 국정조사를 통해 관련 자료를 요청하는 것도 방법이다.
법조인들은 반기보고서 등에 분식회계 혐의가 드러났으면 고발이 없더라도 검찰이 수사에 나설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차병직 변호사는 “장부 숫자가 틀리는 등 현대상선이 해명하지 못하는 분식회계 혐의가 드러나고 있으므로 검찰이 ‘인지 수사’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현대상선이 대출금 4000억원을 2000년 6월7일 산은 영업부에서 1000억원, 구로지점에서 1000억원, 여의도지점에서 2000억원씩 수표로 발행해갔다는 한나라당측의 주장에 대해 산은도 금융실명제법을 이유로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정건용 산은 총재는 “6월7일 4000억원이 빠져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인 영업점과 수표인출 여부 등을 당사자(현대상선)의 동의 없이 공개하면 금융실명제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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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기자 daviskim@donga.com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