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큰돈을 대출해주면서 현대상선의 재무안정성과 상환능력을 전혀 심사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한 것.
2000년 6월 대출 당시 산은 총재였던 이근영(李瑾榮) 금융감독위원장은 그동안 대출절차에 하자가 없다고 주장해왔다. 대출을 승인했던 박상배(朴相培) 부총재도 “현대상선의 유동성위기를 감안해 관련규정에 따라 이사전결로 처리했다”며 무죄론을 펴왔다.
산은 고위관계자의 잘못 시인에 따라 한광옥(韓光玉)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이근영 당시 총재에게 부탁해 대출이 이뤄졌다는 엄낙용(嚴洛鎔) 전 산은 총재의 증언이 더 큰 신빙성을 얻게 됐다.
▽4000억원 대출, 무엇이 잘못됐나〓기업이 당좌운영, 설비투자 등 어떤 명목으로든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여러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재무제표는 기본이고 미래 현금입출금 계획서, 자금사용처 및 상환, 자금조달 계획 등 대출심사에 필요한 자료를 내고 은행들은 이를 토대로 회사의 상환능력을 점검한다.
그러나 산은은 이러한 모든 절차를 생략했다. 4000억원을 대출받기 위한 서류검토 작업은 적어도 한달이 걸리는 데 현대상선은 3일 만에 처리됐다.
산은이 다른 기업에 이만한 돈을 대출해 주려면 신용위원회를 거치는 것이 관례인데 현대상선은 이사전결 규정을 이용했다.
A은행 여신담당 임원은 “과거 은행에 막대한 부실채권이 발생한 것은 은행장이 청와대와 정치권의 대출압력을 받고 기업에 수천억원을 대출해줬기 때문”이라며 “외환위기 이후 모든 대출은 은행장이 배제된 여신위원회를 거치도록 돼 있어 산업은행처럼 4000억원이라는 거금이 이사전결로 나가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윗사람은 빠지고 실무직원만 책임지나〓산은의 자체감사는 현대상선을 담당하고 있는 기업금융1실 직원들이 대출 관련 규정을 제대로 지켰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현대상선 대출건은 한나라당의 주장대로 권력실세가 산은 총재에게 압력을 행사해 이뤄진 것이라면 실무자는 단지 상부의 지시를 따른 죄밖에 없는 셈이다.
따라서 산은의 자체감사 결과 윗사람의 지시를 이행한 실무직원만 처벌받고 실제 대출을 결정했던 박상배 부총재나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면죄부를 받는 결과가 예상되기도 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산은 부총재나 전임 총재가 자체감사에서 징계받은 적은 거의 없다.
금융계는 14일부터 감사원이 산은에 대해 감사를 시작하므로 이 과정에서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대하고 있다.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