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은 검찰 국세청 금융감독원과 함께 합법적인 계좌추적권을 갖고 있는 기관이다. 따라서 의지만 있다면 계좌추적권을 발동해 4900억원 대북송금설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풀 수 있다. 그러나 감사원은 산업은행 대출의 적정성만 따지겠다는 방침이어서 이번 감사가 ‘속빈 강정’이 될 우려가 적지 않다.
이에 따라 현대상선에 대한 대출 과정에서 드러난 갖가지 변칙과 미궁에 빠진 돈의 행방 등을 밝혀내기 위해 감사원이 계좌추적권을 발동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높다.
한편 한광옥(韓光玉)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엄낙용(嚴洛鎔) 전 산업은행 총재를 고소한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도 계좌추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검찰은 현재 엄 전 총재를 출국금지시키고 소환조사를 준비하고 있다.
▽감사원의 산업은행 전면감사〓14일부터 3주 동안 현대상선 대출을 비롯해 산업은행 업무 전반에 대해 정기감사에 들어간다.
감사 대상은 외환위기 이후 산업은행의 부실기업 정리과정, 벤처투자 적정성 등이지만 현대상선에 대한 대출이 핵심 사안이다.
대출 건과 관련해서는 △대북송금설의 진위 △권력 실세의 대출압력 유무 △대출서류 조작 여부 △계좌추적 회피 이유 △자금의 사용 내용 등 5대 의혹 규명에 국민적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러나 감사원은 대북송금설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계좌추적은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만일 계좌추적 없이 감사원 감사가 끝나면 오히려 산업은행에 면죄부를 주기 위한 감사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 의혹 규명에 적극 나설까〓검찰도 한 전 비서실장이 엄 전 총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함에 따라 본격적인 수사를 준비하고 있다.
검찰은 고소인과 피고소인을 비롯해 산업은행 및 현대상선의 담당 직원을 소환조사한다는 방침이다.
검찰이 명예훼손 혐의를 인정할지 여부를 판단하려면 먼저 사건의 진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당시 현대상선의 자금흐름을 파악하는 수단으로 당연히 계좌추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했던 현대상선과 계열사와의 불법 자금거래 내용이 밝혀지는데 대해 검찰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대북송금이 됐건 계열사 지원금이 됐건 기사회생한 현대계열사들이 다시 자금난에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엄 전 총재의 증언대로 계좌추적 과정에서 현정권의 실세가 개입됐다는 증거가 나오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권 및 경제계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검찰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검찰이 계좌추적에 나서더라도 극히 제한적인 조사에 그치거나 아예 계좌추적을 하지 않고 관련자 소환조사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를 통해 의혹이 풀리지 않으면 공권력을 행사하는 기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더욱 커질 것이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