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자금 부실운용]'정책실패' 문책은 없고 국민만 덤터기

  • 입력 2002년 10월 14일 18시 54분


《국회의 공적자금 국정조사가 정부 당국의 비협조와 여야의 입장차로 핵심 관련자의 증언도, 청문회도 없이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지난주 막을 내렸다. 외환위기 후 한국 경제가 회복되는 데엔 공적자금이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157조원이라는 거액의 사용 과정에서 정부의 ‘정책 실패’와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로 세금이 낭비된 부분은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다. 특히 금융계 인사 등에 대한 책임 추궁과 대조적으로 정부당국자들은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는 모습이 정상적인지 반드시 따져봐야 할 사안으로 지적된다.》


157조원의 공적자금(8월 말 현재)이 급히 마련되고 투입되는 과정에서 ‘정책 실패’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지난해 감사원 특감과 최근 국회 국정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바 있다. 부실규모를 잘못 추정하는 바람에 수십조원이 추가로 투입돼야 했다.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가 경영평가위원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잘못된 보고서를 바탕으로 대한종금과 나라종금을 살리는 바람에 꼭 들어가지 않아도 될 돈이 3조원 이상 더 투입된 사실도 밝혀졌다. 이런 정책 실패 가운데는 정부가 몰라서 저지른 ‘실수’도 없지 않지만 ‘고의성’이 의심되는 부분도 있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정부측에서 책임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문제가 되는 공적자금 운용 실패 주요 사례〓성원그룹은 대주주인 대한종금이 98년 2월 종금사 경영평가위원회 1차 평가에선 최하위 E등급 판정을 받고도 2차 평가 실시를 통해 98년 4월 영업재개 승인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처조카 이형택(李亨澤)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와 차남인 홍업(弘業)씨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씨가 예보 전무로 있으면서 탕감해 준 기업 부채는 검찰에서 확인된 성원그룹 관련 4247억원 외에도 99년부터 3년간 1조2500억원에 이른다고 한나라당은 주장한다.

대우그룹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날린 공적자금도 적지 않은 규모다.

금감위는 2000년 6∼7월 부도가 났거나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중인 대우그룹 부실 회사채를 갖고 있던 한국투신과 대한투신에 예보와 자산관리공사를 통해 6948억원의 공적자금을 지원했다. 이 중 2496억원은 곧바로 공적자금 손실로 이어졌다.

특히 정권과의 유착 의혹을 받고 있는 현대그룹을 살리기 위해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공적자금이 사용됐다. 현대그룹에 직간접적으로 지원된 총액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르지만 수십조원에 이른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현대가 무너질 경우 국민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인정하더라도 정경유착이라는 경제외적 이유로 어려움을 겪은 기업에 공적자금이 과다 투입된 것을 정당화하기는 쉽지 않다.


이 밖에 정부는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공적자금 추가조성에 대한 국민의 비판 여론을 피하느라 2차 공적자금 50조원도 당초 계획보다 4개월이나 지체된 2000년 9월에야 조성해 금액을 키웠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결정 라인’에 누가 있었나〓1998년 5월 1차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최종 결정할 당시 ‘경제팀 주요 진용’은 재정경제부의 이규성(李揆成) 장관과 정덕구(鄭德龜) 차관, 금감위 이헌재(李憲宰) 위원장, 청와대의 김태동(金泰東)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었다.

당시 공적자금 조성과 투입에서 가장 많은 정보와 권한을 가진 인사는 이 위원장이었다고 관계자들은 증언한다. 재경부에서는 정건용(鄭健溶) 금융정책국장이 실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공적자금 투입 방식이 부실기업에 직접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부실 금융기관 정상화에 투입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2000년 1월 개각에서 재경부 장관으로 옮겨간 뒤에도 공적자금 관리에 깊이 관여했다. 이 장관은 줄곧 “2차 공적자금 조성이 필요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으나 2000년 8월 개각으로 재경부 장관에 취임한 진념(陳稔)씨는 바로 “40조원의 추가조성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2차 공적자금 투입 당시 주요 인사는 진 장관, 이기호(李起浩)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이근영(李瑾榮) 금감위원장 등이었다.

▽정부측 책임지는 사람은 없어〓공적 자금의 조성과 집행과정에서 상당한 정책 실패가 드러났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감사원의 특감에서도 정부에 대해 책임을 물은 경우는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기껏 ‘주의’ 정도다.

감사원이 부실기업 소유주와 금융기관 임직원 5281명에 대해 재산을 압류하고 60명을 검찰에 고발한 것과는 대비된다. 그래서 ‘솜방망이 특감’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현재로서는 감사원 조치 이외에는 특별히 책임을 물을 만한 견제장치도 없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한 연구위원은 “금융기관의 불법 행위에 대한 처벌 못지않게 앞으로는 감독 당국의 감독 소홀이나 정책 실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공자금 소송 형평성 논란▼


이달 초 법원은 한국투자신탁증권이 변형(邊炯) 전 사장을 비롯한 4명의 전직 임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한투증권은 예금보험공사의 부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변 전 사장 등이 98년 외환위기 때 2조원대의 대우그룹 회사채를 사들여 회사에 1조3000억원의 손해를 끼쳤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8월에는 대한투자신탁증권이 김종환(金鍾煥) 전 사장 등 4명이 대우채 매입으로 7500억원의 손해를 끼쳤다는 소송에 대해서도 무죄 판결을 내렸다.

예보가 부실금융기관 임직원을 대상으로 제기한 소송에서 잇따라 패소하고 있다.

예보는 그동안 “금융기관에 157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으니 임직원들의 부실 책임을 철저히 가려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재임시절 한보철강 기아차 대우그룹 등에 대출을 해 줬다는 이유만으로 금융기관 전직 임직원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하자 ‘공적자금 과다 투입에 따른 국민적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한 조치’라는 비난 여론도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직접 소송에 휘말린 금융계의 반발은 거셌다. 은행 임직원들은 “정부가 ‘부도를 내서는 안 된다’고 여신 회수를 막으며 자금지원을 지시해 놓고 이제 와서 기업 부도에 따른 모든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또 투신 관계자들도 “정부에서 ‘주가가 떨어지는데 투신사마저 팔면 시장이 붕괴된다’며 매도를 막는 데 어떻게 손절매(損切賣) 규정을 지킬 수 있겠느냐”고 항변한다.

그동안 정부가 금융기관의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개입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따라서 실제로 의사결정을 했던 청와대와 경제 부처 관료, ‘막후의 실세(實勢)’들은 빠지고 지시를 ‘성실히’ 따른 금융기관 직원만 책임을 지는 묘한 상황이 벌어진 것.

금융기관 전직 임직원들은 평생을 저축해 장만한 집과 자동차, 은행 예금 등 갖고 있는 재산에 대해 모두 가압류조치를 당해 경제활동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다.

이들이 ‘공적자금 운용 실패’에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정부당국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에게만 잘못을 추궁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정치권 해법 감감▼

“현 정권 실세들이 공적자금을 다 말아먹었다.”(한나라당)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이 저지른 경제 실책을 막았는데 무슨 소리냐.”(민주당)

정치권의 공적자금 책임 논쟁은 한 발짝도 양보가 없다.

한나라당은 “공적자금 운용 과정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친인척 등 실세들이 부당하게 돈을 빼먹은 일이 많다”면서 현 정부의 권력 실세들을 겨냥하고 있다.

김 대통령의 차남인 홍업(弘業)씨와 처조카인 이형택(李亨澤)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 이기호(李起浩·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대통령경제특보를 국정조사 청문회 증인으로 끝까지 고집한 것도 정권 비리와 공적자금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국정조사특위 위원들을 대부분 ‘정권 비리’를 추적하는 작업에 투입했다. 비록 무산됐지만 공적자금 청문회에서도 정책 공방보다 정권 비리를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한나라당 공적자금 국정조사특위 위원장인 박종근(朴鍾根) 의원은 “정권 실세들이 국민 세금인 공적자금을 이리저리 빼 먹었고 정부도 운용을 잘못해 부당하게 과다 투입된 공적자금이 많았다”며 “비리에 연루된 권력 실세와 경제수석, 재정경제부 장관, 금융감독위원장, 자산관리공사 사장, 예금보험공사 사장 등 최고 정책 결정자들에게 모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민주당은 “공적자금이 없었다면 외환위기를 어떻게 극복했겠느냐”면서 “옛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의 정책 실패를 공적자금으로 막아주고 나니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한다”고 ‘과거 정권 책임론’으로 받아친다. 김효석(金孝錫) 민주당 제2정조위원장은 “민주당도 정부의 정책 실패를 무작정 감싸자는 것은 아니다”면서 “백 번 양보하더라도 원죄(原罪)는 한나라당에 있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공적자금을 정권 비리와 연계시키는 것은 ‘빙산의 일각’을 마치 전부인양 과장한 것”이라며 “한나라당이 공적자금 청문회를 끝까지 고집하지 않은 것도 이회창(李會昌) 대통령 후보의 비리가 드러날까 봐 그런 것 아니냐”고 공격한다. 민주당이 기양건설 김병량(金炳良) 회장의 증인 채택을 고집한 것도 이런 주장과 무관하지 않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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