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은행의 복잡하고 불투명한 지배구조는 해외자본에 매각된 뒤 2년10개월 동안 줄곧 잡음을 낳았다.
전체 이사 17명 가운데 사외이사가 16명에 이르는 비대한 이사회 구성, 불법적 스톡옵션 부여 논란, 매각 이후 밝혀진 부실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는 과도한 풋백옵션, 전산 아웃소싱과 관련한 분란, 윌프레드 호리에 전 행장의 전격 경질 등이 그것.
대부분의 잡음은 은행 경영과는 무관하며 이사회 내부의 알력과 대주주의 단기적 이익 추구 때문이었다는 게 금융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은행법상 모든 은행은 대주주의 인적사항과 그들의 주식 소유 변동 사항을 금융감독위원회에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 결제제도의 안정성 도모와 은행업의 공공적 성격 때문이다. 은행이 부실화되면 공적자금으로 구제해야 하므로 모든 나라가 은행업에 대해서는 강력한 규제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다.
▽제일은행의 실제 대주주는 누구인가〓하지만 제일은행은 뉴브리지캐피털이 2개의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소유하는 모호한 지배구조를 통해 국내 은행법 규정을 사실상 무력화했다. 감독 권한을 가진 정부조차 제일은행의 실질적 대주주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이다.
불투명한 지배구조 탓에 제일은행은 외환위기 이후 부실 시중은행을 해외에 매각한 첫 사례이면서도 당초 매각 취지와는 다른 결과를 낳았다. 매각 당시 정부는 “선진적인 은행 경영기법을 기대한다”고 했지만 실제는 이와 동떨어졌다.
외환위기 전 국내 시중은행 가운데 자산 규모가 가장 컸던 제일은행은 현재 덩치도 가장 작고 영업전략에서도 밀리는 초라한 은행으로 전락했다.
▽무늬만 외국계 은행〓매각 당시 기대와는 달리 국내 가계여신에 치우친 영업을 하고 있다. 해외지점과 법인은 4개에 불과하다. 외화자산 규모도 16억달러가 채 안 된다. ‘국제화시대를 선도하는 은행’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국내 영업에 치중하면서도 제일은행은 외국계 은행으로 행세해 왔다. 스톡옵션 불법성 논란이 불거진 2001년 4월 뉴브리지측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본사에서 영문 보도자료를 배포했지만 국내 언론에는 입장 설명조차 하지 않았다.
보통 외국인 투자지분이 10% 이상인 기업은 ‘다국적기업’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은행은 어느 정부로부터 은행업 라이선스(영업허가)를 받았는지에 따라 국적이 정해지며 해당국 금융 당국의 감독을 받게 된다. 따라서 제일은행은 한국의 은행법에 의해 은행업 라이선스를 받은 한국계 은행이며 영업기반 또한 한국이다.
▽공적자금 1조원 추가 투입해야?〓제일은행의 2대 주주인 정부는 제일은행의 대주주도 알지 못할 정도로 방치하다시피 했다.
예금보험공사의 국회 국정감사 보고에 따르면 정부는 올 연말로 끝나는 제일은행과의 풋백옵션에 따라 추가로 1조원의 공적자금을 제일은행에 투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올 들어서만 7000억원 남짓 투입된 점을 감안하면 뉴브리지가 5000억원을 들여 제일은행을 인수한 뒤 들어간 공적자금만 6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매각 이전에 투입된 것까지 포함하면 97년 이후 제일은행에 쏟아 부은 공적자금은 이미 17조원이 넘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셈이다.
예보에 따르면 뉴브리지측의 풋백옵션 요구로 최소 900억원 이상의 공적자금이 부당하게 제일은행에 지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보는 “제일은행에 부실 자산 이전 대금을 주면서 해당금액을 상계했다”고 했으나 이 문제를 둘러싸고 예보와 제일은행은 현재 분쟁을 벌이고 있다.
김용기기자 ykim@donga.com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제일銀 지분구조 의문점▼
제일은행의 지분구조는 두 가지 의문점을 제기한다.
첫째, 뉴브리지가 케이맨군도와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케이맨군도는 오래 전부터 국제금융시장을 떠도는 미국 투자자금의 조세 피난처로 활용되어 온 곳이고 라부안은 개발된 지 4∼5년밖에 안 돼 관련 제도가 허술한 곳이다. 이렇게 볼 때 ‘뉴브리지가 미국 투자자금을 케이맨군도로 옮겨 조세 관련 부담을 털어내고 다시 말레이시아를 통과시킴으로써 자금 원천에 대한 추적을 어렵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둘째, 일본 소프트방크는 어떻게 제일은행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2개의 페이퍼 컴퍼니는 각각의 모회사가 지분을 100%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소프트방크는 ‘KFB 뉴브리지 인베스트먼트 LP’의 지분을 일부 보유했거나 그 위에 있는 모회사 지분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제일은행의 대주주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뉴브리지가 제일은행을 살 때 투입한 돈이 5000억원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프트방크가 100억원의 이윤을 남기고 지분을 매각해 얻은 돈이 1700억원이었다면 소프트방크는 30%에 달하는 제일은행 지분을 소유해 온 것으로 파악된다.
뉴브리지는 그동안 제일은행의 지분 구조를 한국 정부는 물론 제일은행 내부자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제일은행 지분 46%를 소유하고 있는 예금보험공사의 김광남 팀장은 “제일은행 지배주주의 구성에 대해 여러 차례 자료를 요구했으나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제일은행 로베르 코헨 행장도 “페이퍼 컴퍼니가 2개인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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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기기자 ykim@donga.com
▼뉴브리지캐피털 해명▼
본보는 홍콩에 있는 뉴브리지캐피털 동아시아 담당팀에 “왜 2중 페이퍼 컴퍼니를 설치하였는가?”라는 질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뉴브리지캐피털 집행임원 웨이지안 샨은 “제일은행에 투자하려는 미국 투자자들의 절세를 위한 목적”이라며 “이 밖의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다”고 밝혀 왔다.
그는 또 “이러한 구조는 미국 법률자문가들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샨씨는 제일은행 매각 협상 당시 뉴브리지측을 대표해 협상에 참여했고, 이후 제일은행의 합병설이 불거질 때마다 대주주의 입장을 실질적으로 대변해 온 인물이다.
그는 ‘목적은 절세’라고 답변한 뒤 다시 e메일을 통해 ‘비보도’를 요청해 왔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뉴브리지의 해명을 독자에게 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해 보도한다.
▼제일은 매각당시 상황은▼
제일은행 매각은 한국 정부가 국제금융을 잘 몰라 수업료를 톡톡히 치른 사례로 꼽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97년 12월 한국 정부와의 자금지원조건 협상에서 유동성 위기에 처한 서울, 제일은행을 해외 매각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인수합병(M&A) 협상에 경험이 없는 상태였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98년 말까지 서울, 제일은행 가운데 한 곳은 반드시 매각하겠다”고 국내외에 공표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98년 12월 뉴브리지캐피털, HSBC 두 곳과 양해각서(MOU) 체결을 위한 협상을 벌이다 큰 실수를 저질렀다. 뉴브리지캐피털은 코너에 몰린 한국의 상황을 100% 활용하면서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정부는 대통령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뉴브리지캐피털을 선택했고 99년부터 본계약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MOU에 들어있는 한 구절 때문에 본계약 체결 과정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바로 은행의 가치를 국제적 기준(IBP·International Best Prac-tices)에 따라 평가한다는 구절이다.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실에 근무했던 고위 관계자는 “당시 한국에서는 IBP가 얼마나 무서운 뜻을 담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시인했다. IBP는 은행이 갖고 있는 자산(개인 및 기업대출)을 시장가치로 평가하는 것. 예를 들어 은행이 한 기업에 1000억원을 대출해줬는데 이자를 정상적으로 내면 가치를 1000억원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뉴브지리캐피털은 해당 기업의 미래상환능력이 떨어지므로 시장가치를 600억원으로 평가한 것.
이러다 보니 제일은행의 자산가치는 상식 이하 수준으로 떨어졌다. 양측의 가격차가 워낙 커 협상 결렬 위기까지 몰렸다. 당시 재정경제부 실무진은 협상을 깨자며 법률 검토 작업까지 벌였다. 그러나 금융감독위원회는 ‘어떻게 해서라도 팔아야 한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뉴브리지캐피털은 본계약 협상을 통해 부실 자산이 하나도 가져가지 않고 우량 자산만 받아갔으며 우량 자산 가운데서도 나중에 부실해지면 정부가 보상해 주는 풋백옵션 조항을 포함시켰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국민 몫으로 돌아왔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