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 아파트' VS '호텔 아파트'

  • 입력 2002년 10월 30일 16시 13분


'베란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기분 아세요?' 전원형 아파트인 '동일하이빌아파트'에서 사는 오희승씨 (왼쪽)와 한순이씨.
'베란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기분 아세요?' 전원형 아파트인 '동일하이빌아파트'에서 사는 오희승씨 (왼쪽)와 한순이씨.

《아파트도 ‘진화(進化)’한다. 60, 70년대 5층짜리 성냥갑 아파트가 도시민의 주거 수요를 충족시켰다면 80년대는 고층아파트가 택지 부족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90년대에는 신도시 개발과 함께 아파트가 도시 전체를 대표하는 일반적인 주거형태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독한 냉기를 내뿜는 콘크리트 숲이라는 비난은 아파트에 따라붙는 피할 수 없는 한계였다. 이제 2000년대. 도시인들은 또 한번의 진화를 원한다. 자연과 함께 하는 전원형 주거단지와 도심에 밀착한 첨단 인텔리전트 아파트가 그것이다. 자연과 도심이라는 상반된 지향은 이제 막 진화의 결과물을 평가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나무들이 푸른 산소를 왕성하게 뿜어대고 있었다. 풍성한 가을을 즐기려는 듯 이끼 낀 바위 틈새에서 쏟아져 나오는 실개천에는 그 날도 어김없이 그들의 수다가 녹아들었다.

세련된 공원과 투박한 시골이 혼재한 다소 낯선 풍경. 그들이 만족해하는 공간이었다.

경기 용인시 구성읍 동일하이빌아파트에 사는 한순이씨(54)와 오희승씨(51). 서울 강남에서 20년 넘게 살다 작년에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믿으시겠어요? 반딧불이를 봤어요. 웬만큼 깨끗한 곳이 아니면 살 수 없잖아요.”

오희승씨의 자랑이다. 그는 이곳에 온 뒤 기관지염까지 나았다. 자연이 치료해줬단다. 지난 겨울에도 감기 한 번 앓지 않았다.

“살아보지 않고는 자연의 소중함을 몰라요. 저도 큰 기대를 안 했으니까요.”

실제 그랬다. 단지 정문에 들어서자 싱싱한 공기가 온 몸의 세포를 각성시켰다.

한순이씨가 아파트의 사계(四季)를 소개했다.

“한번은 눈이 왔어요. 발코니에서 본 설경(雪景)이 그만이었지요. 5월에 창을 열면 법화산에서 흘러드는 아카시아 향기가 집안을 점령해버려요. 여름에는 어찌나 시원한지…. 에어컨은 ‘비상용’이에요. 56평형 7월 관리비가 11만3000원이었다니까요. 지금 보셔서 아시겠지만 가을 풍경도 더할 나위 없지요.” 한 씨 집 탁자에는 이제 막 주워온 단풍이 소품으로 얹혀져 있었다.

입주민끼리 나누는 정(情)은 이 아파트가 준 기대치 않은 선물. 시골 빨래터처럼 사람을 끌어 모으는 실개천, 단지 뒤편 등산로, 수영장과 골프연습장에서 오다가다 만나는 이들은 모두 한 마을 이웃이 된다.

“밖에 나갈 때는 정문에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입주민들을 태워주는 게 당연한 것처럼 됐어요. 공동체 문화를 다시 배우고 있어요.”

오 씨는 이 곳에 온 뒤 커피숍에 가본 적이 없다.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집이 야외카페보다 더 좋아요. 한 번 와본 친구들도 꼭 저희 집에서 만나자고 해요.”

교통은 불편하다. 아침에 서울까지 나가려면 족히 1시간은 걸린다.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어요. 이 정도 환경에서 다른 걸 또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이겠지요.”(한순이씨)

용인〓고기정기자 koh@donga.com

▼도곡동 '아크로빌' 거주 김현자씨▼

“엄마! 호텔이 따로 없네요.”

“여보! 정말 호텔 스위트룸이야.”

99년 12월 19일. 김현자씨(47·여·사진) 가족이 서울 강남구 도곡동 ‘대림아크로빌’ 36층으로 이사한 날. 아들(19)과 남편(46)의 첫 반응은 김씨의 예상에 적중했다.

이름도 생소한 주상복합아파트. 그러나 오랜 외국 생활을 한 김씨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한국의 아파트 문화에 대한 불만이 커지던 차에 들은 대림아크로빌 분양 소식. 과감히 개포동 주공아파트를 처분하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김씨가 고른 54평형의 분양가는 약 5억4000만원.

고층 주상복합아파트 '대림아크로빌'에서 사는 김현자씨가 지하1층 스포츠클럽에서 골프 연습을 하고 있다. -원대연기자

“주택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잖아요.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죠.”

3년 뒤 김씨 가족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엄마! 독서실 다녀올게요.”

“여보! 나 지금 운동하러 나가요.”

현관을 나서는 아들과 남편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각 2층 독서실과 지하 1층 스포츠센터로 내려간다. 처음에는 고층건물(46층)의 36층에서 산다는 것이 내심 불안했다. 그러나 요즘은 엘리베이터를 마을버스 삼아 타고 다닐 정도로 자연스러워졌다.

김씨의 삶도 달라졌다. 올해 아들이 대학에 진학한 뒤부터 김씨는 자기 계발에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멀리 나갈 필요도 없었다. 스포츠센터에서 골프와 수영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아크로빌 부녀회가 2층 커뮤니티 홀에서 주최하는 문화강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동안 매사에 소극적이었는데 주거문화가 바뀌더니 성격도 달라지더군요.”

'대림 아크로빌' 전경

김씨는 요즘 사람 사귀는 것이 슬슬 즐거워진다고 말했다. 아파트 주민만 이용하는 인트라넷을 통해 동호회 활동을 해볼 계획이다. 주공아파트에서는 10년 넘게 살았어도 이웃이 누구였는지도 몰랐다.

건물의 공기청정 시스템과 자동 온도조절 기능은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고층이어서 창문을 활짝 열고 맞바람을 이용해 환기를 할 수 없었다. 녹지가 적다는 것도 흠.

“근처에 양재천이 있잖아요. 걸어서 3분 거리죠.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맘껏 산책을 할 수 있어요. 양재천에 사는 너구리를 구경하는 재미 아세요?” 25일 바로 옆 타워팰리스 입주가 시작돼 주변에서는 교통대란을 걱정하기도 한다. “크게 신경 안써요. 이 동네에는 출퇴근이 자유로운 사람이 많거든요. 사실 건물 안에 필요한 시설은 대부분 갖춰져 있어 밖에 나갈 일도 많지 않아요.” 아크로빌은 최근 ‘강남 아파트 랠리’에서 예외였다. 현재 평당 매매가가 분양가와 큰 차이가 없다. “이사온 뒤부터 아파트 값에는 흥미가 없어졌어요. 평생 살 집이거든요.”

차지완기자 maruduk@donga.com

▼전원단지 '이래서 싫어'▼

“전원주택이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죠. 그런데….”

김현자씨는 ‘전원주택’ 소리에 눈살부터 찌푸렸다. 이어 ‘전원주택이 싫은 이유’를 손가락을 꼽아가며 늘어놓기 시작했다.

“외진데 홀로 떨어져 있으니까 위험하잖아요. 도시처럼 방범(防犯)을 기대하기도 어렵고요.” 전원형 아파트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김씨는 응급상황에 대처하기 힘들다는 게 가장 큰 불만이었다. 주상복합아파트에서는 응급상황이 생겼을 때 인터폰만 누르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24시간 대기하는 경비와 안내요원이 병원 연락부터 이송까지 도와주지만 전원주택에서는 이 같은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또 병원을 간다고 해도 도시만큼 의료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져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학령기 자녀를 가진 부모로서는 교육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김씨는 주상복합아파트로 이주했을 때 아들(21)이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주상복합 '이래서 별로'▼

용인에 사는 오희승씨는 실제 경험에 바탕한 ‘주상복합 기피론’을 풀어놨다.

“이 곳으로 이사올 때 집안 가구들을 죄다 닦았어요. 그런데 검은 기름때가 나오지 않겠어요. 아무리 문질러대도 묵은 때가 벗겨지질 않더군요.” 도심 매연이 그만큼 심하다는 뜻이다.

자녀들을 소모적인 무한경쟁에 맡겨 둘 수 없다는 것도 오씨가 강남을 거부하는 이유.

교육시설이 많은 것과 교육환경이 좋은 건 다른 문제라고 설명했다.

한씨는 “강남에서만 살던 자녀들이 경기도로 옮겨오자 이전보다 훨씬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됐다”며 “학력과 교육시설 수가 반드시 일치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차지완기자 marud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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