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5년 한국 어떻게 변했나]② 기업, 미완의 새틀짜기

  • 입력 2002년 11월 18일 18시 37분


‘지구상에 살아남은 생물은 가장 강한 생물이 아니라 가장 적응을 잘 하는 생물이다.’

삼성그룹의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 등 삼성 고위 임원들은 ‘진화론의 아버지’ 다윈의 이 말을 자주 인용한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후 한국 재계의 흐름을 보면 이 말이 실감난다.

한국 경제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현금 확보가 지상 명제가 된 가운데 ‘군살빼기’에 힘을 쏟으면서 재무건전성을 높인 기업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과거 방식을 고집한 기업은 사라져갔다. 외환위기 이전 재계 서열 1위였던 현대를 비롯해 쌍용, 기아, 한라, 동아, 고합, 해태, 뉴코아, 아남 등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던 주요 그룹이 무너지거나 휘청댔다.

살아남은 기업은 필사적으로 사업 및 인력구조조정을 시행했다. 이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친 일부 기업은 외환위기 이전보다 내실이 더 탄탄해졌다는 평가도 받는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는 지적이다.

▽덩치보다 수익 위주로〓외환위기 과정에서 크든 작든 홍역을 치른 대기업들은 경영목표의 핵심을 매출에서 수익으로 바꾸었다. ‘덩치’만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 이를 위해 빚을 최대한 줄이고 핵심 역량 위주로 사업을 재편했다.

외환위기를 전후한 대기업의 경영실적을 훑어보자.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97년 18조원에서 지난해 32조원으로 1.8배로 늘었지만 순익은 1235억원에서 2조9400억원으로 23.8배로 급증했다. 이 기간에 부채비율은 295%에서 43%로 격감했다.

현대자동차도 매출은 두 배 정도로 증가한 반면 순이익은 465억원에서 1조원 이상으로 늘었다. SK텔레콤의 부채비율은 211%에서 87%로 줄었다. 각 기업은 ‘백화점식 사업구조’에서 벗어나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을 찾았다. 민영화된 포스코는 창립 이래 줄곧 견지해 온 ‘최대 생산, 최대 판매’ 체제를 ‘적정 생산, 최대 이익’으로 전환했다. 삼성전자는 외환위기 직후 2년간 143개 생산 품목을 줄였다.

수익 극대화를 위해 혹독한 구조조정도 따랐다. 국내 간판그룹인 삼성의 임직원 수는 외환위기 전 16만명에서 현재 11만5000명으로 30% 줄었다.

▽달라진 사장단 회의〓주요 그룹의 의사결정 구조에도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 여전히 그룹 총수의 영향력이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계열사의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오너의 눈치를 보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삼성은 매주 수요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본관에서 그룹 사장단 회의를 연다. 그러나 과거처럼 계열사별로 주요 현안을 모두 보고하고 그룹 회장이 토를 달던 모습은 눈에 띄게 줄었다. 대신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듣는 ‘수요 간담회’로 성격이 바뀌었다. 물론 재무구조, 차세대 사업, 핵심 인재 확보 등 그룹을 관통하는 주요 핵심 과제는 여전히 그룹 총수 및 구조조정본부가 관여하긴 하지만….

LG그룹도 두 달에 한 번 주요 사장이 참석하는 간담회를 열고 1, 2개월에 한 번은 부사장까지 포함하는 70∼80명 규모의 확대 사장단 회의를 갖는다. LG 구조조정본부 정상국(鄭相國) 상무는 “사장단 회의에서는 주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의사결정은 각 회사의 이사회에서 한다”고 전했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수치상으로 보면 주요 대기업의 재무구조는 외환위기 전보다 훨씬 건실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기업체질이 근본적으로 얼마나 튼튼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 시각이 많다.

연세대 박상용(朴尙用·경영학) 교수는 “한국 기업들은 외부의 압력으로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제도를 도입했지만 기업 내면으로 체질화하지 못했다”며 “계열사간 거래는 꽤 투명해졌지만 총수 일가와 회사간의 거래는 아직도 불투명한 부분이 많다”고 비판했다.

한국 기업의 전반적인 국제경쟁력도 한계가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올 상반기에 539개 상장사가 17조원의 이익을 냈지만 외환위기 전의 환율과 금리를 적용해 보면 18조원의 적자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소 이범일(李範一) 상무는 “현재 기업의 상대적 호황은 구조조정의 효과로 볼 수 있으며 이젠 내리막길만 남았다”며 특히 ‘살 빼기’와 단기 성과에만 집착해 장기 성장의 잠재력이 크게 훼손된 것을 걱정했다.

또 반도체, 자동차, 휴대전화, 철강, 조선 등 3∼5가지 상품만 세계적 경쟁력을 갖췄을 뿐 나머지 산업은 대외 여건이 조금만 나빠지면 언제든지 ‘겨울’을 맞을 만큼 기업의 체질이 허약한 것도 큰 문제점으로 꼽힌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최호원기자 bestiger@donga.com

실패한 벤처지원 정책

2만개…4만개…부푼꿈 정권유착에 '펑크'

“2002년까지 모두 2만개의 벤처기업을 육성하겠다.”(1998년 11월, 김종필·金鍾泌 당시 국무총리)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겠다.”(1999년 2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벤처기업을 2005년까지 4만개로 늘려 고용인원을 120만명으로 늘리고 국민총생산(GNP)에서 차지하는 벤처기업 비중을 18%로 높이겠다.”(2000년 1월, 산업자원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속에서 출범한 현 정부는 대기업에 대해서는 ‘구조조정의 칼날’을 들이대며 강하게 압박했으나 벤처기업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지원정책을 폈다.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제는 벤처기업이 한국경제의 성장 동력이며 고용의 돌파구”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벤처기업 확인 제도를 통해 수적 팽창에 주력했다. 또 일단 벤처기업이라고 확인해 준 곳에는 자금 세제 기술 인력 입지 등을 기존 기업에 비해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이런 정책에 대해서는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마저도 2000년 4월 ‘벤처산업의 발전전망과 정책과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문제가 많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벤처기업 수 증가가 창업 활성화와 고용 증대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벤처기업의 규모와 경영 능력에 비해 자금이 초과 공급되면서 일부 기업이 금융업 인수를 시도하는 등 기업가 정신이 퇴색하고 있다는 것.

KDI의 걱정은 불과 6개월 뒤 현실로 나타났다. 2000년 10월 정현준(鄭炫埈)씨의 동방상호신용금고 불법대출사건이 터진 것을 시작으로 진승현(陳承鉉)-이용호(李容湖)-윤태식(尹泰植) 게이트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특히 벤처비리의 사슬에는 현 정권의 실력자들과 권력기관까지 깊숙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이 더 컸다.

벤처비리가 정권의 위기로 번지자 정부는 올해 2월부터 일부 부실 벤처기업을 골라내 퇴출시키는 등 ‘옥석 가리기’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때를 놓쳤다는 지적이다.

최승로(崔勝老) 자유기업원 기업연구실장은 “정부기관이 벤처기업을 지정하고, 직접 지원한다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이라며 “정부는 기업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외국기업 급부상 명암

외자유치 급했지만 헐값매각 부작용 불러

스웨덴 볼보그룹이 1998년 삼성중공업의 중장비 사업 부문을 인수해 출범한 볼보건설기계 코리아. 99년 3670억원의 매출과 20억원의 순손실을 보였으나 지난해에는 매출 5400억원, 순이익 550억원으로 성과가 두드러졌다. 또 2000년에 2억달러 수출탑을 받은 데 이어 올해는 3억달러 수출탑을 수상할 전망이다.

‘외환위기’가 한국 경제계에 몰고 온 큰 변화 중 하나는 외국 기업의 급부상이다.

인수합병(M&A), 전략적 제휴, 지사 설립 등 직접투자 방식으로 국내에 진출한 외국 기업은 올 9월 말 현재 1만2509개. 97년 말의 4419개와 비교하면 약 3배로 늘어났다. 97년부터 작년까지 5년간 대한(對韓) 투자액은 589억달러로 1962년부터 96년까지 35년간의 투자액을 모두 합친 177억달러의 3배를 넘는다.

산업연구원(KIET)은 외국인투자가 △외환 확보 △고용 증대 △무역수지 개선 △기술력 확충 △기업 구조조정 촉진 등 한국 경제에 대체로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듀폰 코리아의 나이젤 버든 사장은 “한국 기업들이 재무건전성과 투명경영을 중시하는 외국 기업과 교류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수익 위주 전략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바스프의 디트리히 폰 한스타인 사장은 “한국의 높은 교육 수준과 인프라 구축도가 외국 기업에 매력적이긴 하지만 불안정한 노사관계가 장애물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외국 기업의 진출이 ‘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로라하는 한국 기업이 외환위기 후 ‘헐값’에 해외에 팔려 ‘무늬만 한국 기업’인 곳이 의외로 많다. 국내에 들어온 외국 기업의 68.5%가 기술개발(R&D) 능력을 갖췄지만 이 가운데 한국의 관련 업체에 기술지도를 해 주는 기업은 28.5%에 그친다. 또 외국계 제조업체 중 한국에서 부품을 조달하는 곳은 40%에 불과하다.

장윤종(張允鍾) KIET 부원장은 “지난 5년간 외국 기업들은 한국에서 ‘남는 장사’를 했다”면서 “외국인 투자 증가의 ‘그늘’을 없애려면 외국 기업과 국내 관련 업체간 지역적 연계효과를 극대화하고 기술을 많이 이전하는 업체엔 감세 혜택을 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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