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운데 SK계열사들이 7월 두루넷의 전용회선을 인수하고, 11월 증권정보사이트인 팍스넷을 인수하자 SK㈜ 최태원 회장이 참여하는 모임 ‘브이소사이어티’가 재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매주 모임을 갖는 브이소사이어티에는 인수된 상대기업 두루넷의 이홍선 부회장, 팍스넥의 박창기 사장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벌과 벤처CEO의 이너서클?
![]() |
브이소사이어티는 단순 사교 모임이 아니다. 자본금 42억원으로 2000년 9월 출범한 ‘주식회사’다. 당초 설립목적은 ‘벤처 성공을 위해 선도 벤처기업과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커뮤니티를 구축한다’는 것.
초대 주주인 최태원 회장(42), 신동빈 롯데 부회장(47), 이웅렬 코오롱 회장(46),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40),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34), 이홍순 삼보컴퓨터 부회장(42), 김준 경방 전무(39) 등 이른바 재벌 2, 3세인 대기업 CEO 11명과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사장(40), 변대규 휴맥스 사장(40),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사장(34) 등 벤처기업인 10명이 각 2억원씩 출자했다. 주주들은 재경부 서기관, 삼성증권 이사를 거친 이형승씨(38)를 사장으로 선임했다.
현재는 발기인 외에 박용만 ㈜두산 사장(47), 조동만 한솔아이글로브 회장(49), 김원 삼양사 사장(44), 서지현 버추얼텍 사장(37) 등 34명이 추가로 가입해 회원 수가 55명으로 늘었다. 이 사장은 “삼성이나 현대차에서도 적당한 시기가 되면 가입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
모임 결성 당시 브이소사이어티에 대한 시각은 ‘재벌 2, 3세들의 폐쇄적인 이너서클(inner circle)일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참여인물의 면면이나 연령대를 보아 “전통적인 대기업과 벤처가 어우러지는 차차기 전경련 모임의 맹아(萌芽) 아니냐”는 분석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들의 활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CEO 회원들의 현장학습 중심의 공부모임’이라는 점이다.
회원들은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쯤 서울 강남구 논현동 브이소사이어티 건물에 모여 식사를 함께 하고 오후 7시30분부터 세 시간가량 스스로 ‘포럼’이라 부르는 토론회를 연 뒤 와인 미팅으로 뒤풀이를 한다. 주로 회원들이 하나의 주제를 놓고 자신의 경험을 발표하는 세션이 2∼3개 진행된다. 외부 강사를 초빙하는 콘퍼런스도 10여 차례 열었다.
2002년 회원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여 여러차례 서로의 경험을 듣고 다룬 주제는 ‘모바일인터넷’ ‘기업의 실패 사례’ ‘인재활용’이었다. ‘모바일 인터넷’을 공부할 때는 SK㈜의 최 회장과 임원들, 버추얼텍 서지현 사장, 시큐어소프트 김홍선 사장 등이 발표자로 나섰다. 기업의 인재활용(HR)과 관련해서는 여러 기업이 ‘핵심 인력 유치와 유지를 위한 평가·보상 전략’, ‘사내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조직 활성화’ ‘인적자원 가치의 극대화’ 등의 주제를 다뤘다.
매 분기가 시작되기 전 브이소사이어티의 홍명혁 경영기획이사가 이끄는 팀은 회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뒤 주제를 결정한다.
올 3·4분기(7∼9월)의 주제는 ‘기업의 실패 사례’. 6월초 홍 이사가 △실패사례 △바이오테크놀로지 △지식경영시스템 도입과 활용 등을 후보로 놓고 회원들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실패사례가 ‘최다득표’를 했다. 일단 주제가 정해지자 회원 가운데 주제 발표를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에게 의사를 타진했고 특별히 거부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를 발표자로 선정했다.
이형승 사장은 “포럼을 통해 CEO들은 서로의 경영철학을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쌓인 신뢰를 토대로 (SK의 두루넷, 팍스넷 합병과 같은)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 간다”고 말했다.
●최고의 ‘멘토’는 또 다른 경영자
11월 셋째주 현재 총 103회 진행된 포럼의 평균 출석률은 48%. 최근에는 오프라인 기업들의 출석률이 높은 편이다. 참석자는 17∼35명을 왔다갔다 한다. 이 중 최태원 회장, 김준 전무, 이찬진 드림위즈 사장, 권도균 이니시스 사장 등은 해외 출장 때를 제외하고는 늘 참석하는 ‘열성파’다.
단순히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라면 매주 목요일마다 많은 기업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일 필요는 없다. 일단 안면을 튼 뒤에는 얼마든지 따로 만나 사업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 그럼에도 매번 모임에 참석하는 이유에 대해 회원들은 “경영상 부닥친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고 다른 CEO들로부터 해법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SK가 무선랜 사업을 도입할지 여부를 놓고 고민할 때 브이소사이어티의 많은 회원들이 “앞으로 통신 시장의 대세는 무선랜”이라며 도입을 적극 권했다. 최태원 회장은 나름대로 사업의 위험성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지만 모임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결국 사업 시작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본시장을 뚫지 못해 고민하던 한 기술벤처의 사장은 회원인 대기업 CEO가 일본에 자사 제품을 처음 소개했을 때의 전략과 성공담 주제발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일본 시장 공략 방법을 수정했다. 주제발표한 기업의 전략과 시스템을 그대로 본떠 일본시장의 문을 두드렸던 이 벤처회사는 이후 안정적으로 시장에 진입했다.
권도균 이니시스 사장은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이 유통과 관련한 프리젠테이션을 한 적이 있다. 신세계가 부닥쳤던 어려움, 이를 극복하는 과정, 앞으로의 전망 등을 설명했는데 어떤 교과서나 전문가에게 배운 것보다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벤처기업 사장들은 대기업 오너들로부터 “기업을 경영한 지 2∼3년 됐는데도 경영실적이 좋았다 말았다 하는데 도대체 10년간 기업을 이끌어온 저력은 무엇인가”라거나 “직원이 10명에서 60명선으로만 늘어도 관리가 어려운데 1000명이나 되는 직원은 어떻게 관리하나” 같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는다. 대기업 CEO들은 실무진을 거치는 동안 거르고 걸러져 전달되는 정보가 아닌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데서 모임 참가의 의미를 찾는다.
이 모임에서 주제 발표된 내용은 웹사이트에 올려져 회원들이 필요할 경우 다운로드받게 한다. 그러나 발표는 하지만 기업 기밀이라 다운로드가 금지되는 자료도 적지 않다.
회사의 고민을 드러내는 것은 자칫 자신의 약점을 공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CEO들이 일정 정도 고민을 털어놓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형승 사장은 “시장과 고객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CEO들은 늘 새로운 문제에 부닥친다”며 “이럴 때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데 교수 등 전문가로부터는 아이디어는 얻지만 실제적인 도움을 얻지는 못한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CEO들이 서로에게 가장 큰 ‘멘토(mentor·지도교사)’가 된다”고 설명했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CEO들의 공부모임 | |
|
|
|
|
|
|
|
|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