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극단적 반미(反美) 주장이 사회의 주류(主流)를 이루는 일은 없다. 공산당은 주일미군 철수를 요구하지만 전체 흐름에서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다. 시위도 폭력으로 번지지는 않는다.
일본정부의 입장은 더 확고하다. 외교정책의 핵심은 확고한 대미(對美)동맹 유지다. 통상문제 등에서는 때로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국제현안에서는 항상 미국과 공동보조를 맞춘다.
일본이 이처럼 미일 관계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이 노선이 국익에 최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의 ‘방위 우산’과 세계 자유무역질서는 일본의 ‘경제 기적’을 가능케 한 배경이었다. 때로 미국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이 질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멸로 이어진다는 공감대가 일본사회에 깔려 있다.
필자도 미국에 대해 복잡한 생각을 갖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미국의 양면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 우선 그렇다. 젊은 시절 주한미군과 함께 군복무를 하면서 본 그들의 이런저런 모습도 그리 좋은 기억으로는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 확산되는 극단적 반미기류를 보면서 자칫 부메랑으로 돌아와 우리 발등을 찍을 위험성을 느낀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깃발을 내려도 무방하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이념적 혼돈이 심해졌지만 그런 선택도 불사하겠다는 한국인은 극소수라고 믿는다.
공공연한 주한미군 철수 주장과 미국상품 불매운동은 안보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 더 냉정히 말하면 한국 내의 반미 움직임이 ‘수위’를 넘어설 때 미국이 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1차 응징카드’는 경제 쪽이다. 한국경제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지난해 한국의 대미 수출액은 314억100만달러로 전체 수출의 20.1%를 차지했다. 작년 9월말 현재 외국인의 국내 직접투자액 73억달러 가운데 미국 자본 비중은 56.2%(41억달러)에 이른다. 2001년 말 현재 외국인보유 한국 상장기업 시가총액 94조원 중 미국 몫은 53.2%(50조원)나 된다. 여기에 갑작스러운 주한미군 철수 때의 대체전력(戰力) 확보 부담과 한국의 국가위험도(country risk) 상승변수까지 생각해 보자.
한미 관계가 보다 성숙하고 평등한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는 데 누가 이의가 있겠는가. 하지만 자칫 결점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쳐 일을 통째로 망치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어리석음을 범해선 안 된다.
빈대를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수는 없는 일이다. 현실에서 눈을 뗀 지나친 감상주의와 극단주의는 우리 모두의 파멸로 이어질 수도 있다.
권순활 경제부 차장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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