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종’이기를 거부하는 경영인
박 회장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대범한 듯 치밀한 성격’이라고 평한다. 그가 공식 석상에서 툭툭 던지는 시원시원한 답변들은 오랜 사고(思考)와 세심한 준비를 거쳐서 나오는 것이기에 쉽게 흘려 들을 수 없다.
그와 인터뷰하기 며칠 전 대한상의 홍보실로부터 걸려온 전화. “예상 질문 좀 먼저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이것저것 궁금했던 사안을 모아 질문서를 만들어 보냈더니 그 다음날 e메일이 왔다. 2개 면에 걸쳐 인터뷰 기사를 쓰고도 남을 만한 방대한 분량의 답변. 본인이 직접 작성한 내용이다.
대한상의 회장, 두산중공업 회장 등 직함이 60개가 넘는다는 바쁜 기업인이 장문의 답변서를 만들어 보내주는 세심함이 확실히 남다르다.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서면 인터뷰로 끝내려는 건가’ 하는 걱정이 슬슬 앞섰다. 그러나 한 해가 저물던 지난해 12월27일 대한상의 회의실에서 만난 그는 특유의 달변으로 두시간여 동안 술술 얘기를 풀어나갔다.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실력이 대단하신가 봐요. 그 긴 답변서를 하루만에 뚝딱 만들어 내시는 걸 보니….” 자리에 앉자마자 기자가 말을 꺼냈다.
“아, 크리스마스에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쳐봤어. 그런데 그거 치느라고 약속에 늦을 뻔했어. 난 일일이 자판 들여다보면서 치니까 오래 걸리거든. 직원들은 내가 컴퓨터 치는 속도가 느려서 그나마 다행이라더군. 안 그래도 e메일을 너무 자주 보내서 부하들을 못살게 구는데 자판까지 빨리 두드리면 지시 사항이 더 길어지잖아.”
그에게는 ‘사이버 최고경영자(CEO)’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시도 때도 없이 e메일로 업무를 처리하고 결재를 하는 통에 직원들은 그가 출장 갔을 때나 휴일에나 컴퓨터를 켜 두는 것이 버릇이 됐다.
그러나 정작 박 회장은 이 별명을 영 마땅찮아 한다. 컴퓨터를 못하는 다른 CEO들이 이상하지 왜 자신이 ‘별종’ 취급을 받느냐는 것.
“얼마 전 경영인 모임에서 한 CEO가 부하 직원에게 신문 기사를 복사해서 팩스로 보내라는 거야. 한심하더라고. 인터넷에 들어가면 금방 찾아볼 수 있는 걸 왜 여러 사람 귀찮게 하는지….”
● 공직자들의 모성보호본능?
박 회장은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인 96년 두산그룹 구조조정에 뛰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조조정이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룹의 핵심인 OB맥주 회장이었던 그는 무리한 투자로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생존’을 위한 선택을 했다.
주변에서는 두산이 돈 되는 건 다 팔려고 내놓자 “그 돈으로 뭘 할거냐”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가 “뭘 하긴, 빚 갚지”라고 아무리 대답해도 잘 나가는 기업을 처분해 부채를 해결한다는 발상은 다른 기업인들에게 쉽게 먹혀들지 않았다.
구조조정을 하면서 유동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 박 회장은 지금도 자나깨나 ‘현금, 현금’을 외친다고 한다. 외환위기 이후 2차 구조조정에 나선 두산은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2000년 한국중공업을 인수하면서 재계 순위 10위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기업 구조조정에 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이 많다. 위기를 겪어본 기업들이기에 정부가 가만히 놔둬도 살기 위해 스스로 구조조정을 한다는 것. 그는 “정부가 규제의 끈을 계속 쥐고 있는 한 기업들은 눈치 안 보려고 계속 해외로 빠져나가고, 이로 인한 국제경쟁력 하락은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공직자들에게는 ‘내가 아니면 누가 보살피랴’ 하는 정서가 있는 것 같아. 좋게 말하면 모성보호 본능이지. ‘탐욕스러운 기업’과 ‘우매한 국민’을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이 공직자들 사이에 깊게 자리잡고 있으니 규제 완화를 몇 천건 했다고 해도 핵심 규제는 꿈쩍도 안 하지.”
그는 무작정 중국 등 해외로 나가는 기업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자본과 기술 없이값싼 인건비만 믿고 중국 진출을 시도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라는 것. 특히 중소기업들이 새겨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이런 신중론은 두산그룹이 값싼 노동력만 믿고 중국에 들어갔다가 실패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두산은 87년부터 식품 소주 의류 공장을 줄줄이 중국에 차렸지만 모두 철수하고 말았다. 그는 중국을 ‘기회 반, 위협 반’이 아니라 ‘기회 3분의 1, 위협 3분의 1, 위험 3분의 1’의 나라라고 평한다.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 ‘몸치’와 국제무대
박 회장은 국제활동에 열심인 경영인이다. 지난해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과 국제상업회의소(ICC) 부회장에 연이어 선출됐다. “돈도 가져다 주지 않고 시간도 많이 잡아먹지만 명예로운 자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난해 말 박 회장은 ICC 부회장에 선출된 후 거나하게 취해 파리의 숙소 호텔에서 대한상의와 두산중공업 사내 게시판에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눈길을 끌기도 했다.
국제무대 ‘체질’이냐고 묻자 그는 계면쩍게 웃으며 “사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답한다.
“심통 많고 무뚝뚝한 성격이야. 그렇지만 국제무대는 사교성보다는 성실성을 높이 쳐주지. 국내 업무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국제관련 회의가 있으면 반드시 참석하는 적극성을 보인 것이 인정을 받는 것 같아.”
1년에 다섯 달을 해외에서 보내는 그는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꽃이나 동물의 사진을 찍기 위해 식물원과 동물원을 찾아다니는 취미가 있다.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선 그의 촬영 솜씨는 두산 계열의 동아출판사 백과사전에 실려 있는 수백장의 그의 사진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명실상부한 세계 체육계의 거물임에도 그는 잘하는 운동이 하나도 없는 ‘몸치’(운동신경이 둔한 사람)임을 고백한다. 걷다가도 잘 넘어진다는 그는 국제유도연맹(IJF) 회장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아직 유도 도복조차 입어본 적이 없다.
스포츠와 경영을 넘나드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둘 사이의 공통점을 물어봤다. 한참 생각한 그는 “둘 다 한 편의 드라마”라고 답한다. 공정한 룰을 지키는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박용성 회장 거침없는 말말말▼
여타 대기업 경영자들과는 달리 개인적인 소신을 거침없이 얘기하는 박용성 회장에게 혹시 ‘뒤탈’이 걱정된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이 대답 역시 시원시원했다.
“올바른 소리만 해서 그런지 뒤탈을 걱정한 적은 없어. 그렇지만 신경이 안 쓰이는 건 아니지. 알다시피 우리 사회에는 형법에도 없는 ‘괘씸죄’라는 게 있잖아.”
그는 “인심을 잃게 되면 자기 혼자만 잃게 되고, 반대로 득이 된다면 모두한테 득이 되는데 기업인들이 뭐하려고 목청을 높이겠느냐”면서 “그렇기 때문에 경제단체가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박 회장의 기업 경영관을 엿볼 수 있는 소신 발언 몇가지를 발췌해 소개한다.
◇“나에게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 강연에서. 사업 매각을 하려면 부실 기업이 아닌 우량 기업부터 내놓아야 한다면서.
◇“문어발 경영은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핵심 역량만 있다면 문어보다 훨씬 다리가 많은 지네발 경영을 해도 괜찮다.”=2001년 6월 관훈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노는 제도를 국제기준으로 하려면 일하는 제도 역시 국제기준으로 개선해야 하는 것 아닌가.”=2002년 2월 노동부장관 초청 간담회에서 주5일 근무제 도입과 관련해.
◇“중국은 고도성장 후 추락한 일본 모델을 답습한 한국을 본받지 말고 기업가치를 중시하는 서구식 경영 마인드를 가져라.”=2002년 3월 중국 상하이 푸단대 초청 강연에서.
◇“첨단병을 앓고 있는 한국기업들은 들쥐떼 근성을 갖고 있다. 어떤 사업이 좋다고 하면 충분한 검토도 없이 한꺼번에 몰려든다.”=2002년 3월 포스코 초청 특강에서.
◇“예부터 한국을 일컬어 ‘조용한 아침의 나라(Nation of Morning Calm)’라고 했는데 요즘은 ‘분란이 많은 아침의 나라(Nation of Morning Trouble)’라는 용어가 생겼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규제가 생겨 분란이 끊이질 않는다는 얘기다.”=2002년 6월 월드 비즈니스 리더스 라운드테이블에서.
◇“돈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나. 그런데 쓰는데 익숙한 정치인과 관료들은 항상 쓸 궁리만 한다.”=2002년 12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박용성 회장은▼
△1940년 서울 출생, 두산그룹 고(故) 박두병 회장의 6남1녀 중 3남(장남 박용곤 그룹명예회장, 차남 박용오 그룹회장, 4남 박용현 서울대병원장, 5남 박용만 그룹사장, 6남 박용욱 개인사업)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69년 미국 뉴욕대 MBA
△1974년 두산식품 전무
△1984년 동양맥주 사장
△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두산중공업 회장, 국제유도연맹 회장, 국제올림픽위원, 국제상업회의소 부회장 등
△가족: 부인 김영희(金榮姬)씨와 2남(장남은 두산 근무, 차남은 뉴욕대 MBA), 손녀 2명
△취미: 사진 찍기, 음악 듣기(CD 1만장 소장), 골프(핸디 14)는 시간이 아까워 중단
△주량: 주류 회사 대표 경력답게 빨리 많이 마시는 것으로 정평
△독서: 잡독(雜讀)형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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