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의 개인 감정이 기업과 사업의 존폐로=새로 권력을 잡은 집권세력이 ‘통치명분’으로 재벌개혁 등을 삼기도 하지만 ‘특정 기업 손보기’로 일탈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정주영(鄭周永) 전 현대명예회장은 그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92년 대선 이후 나와 현대에 가해진 정치보복은 생각하기도 싫다. 소도 말도 웃을 후진국적 정치폭력이 백주에 횡행했다’고 썼다.
현대는 산업은행의 설비자금 대출중단, 해외주식예탁증서(DR) 발행 불허 등 여러 가지 제재를 당했다.
산업자원부의 한 국장급 간부도 “대선 전에 금융기관과 함께 설비도입 계약을 마쳤는데 선거가 끝나니까 아무런 설명 없이 대출을 중단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국제그룹은 1985년 2월 부도를 내고 해체될 때 당시 2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7위의 기업이었다. 제2금융권에서 2000여억원의 여신을 회수한 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하지만 이는 2개월여 전인 1984년 12월 정부가 국제그룹에 대한 약 860억원의 ‘완매 대체환 지원 방침’을 바꿔 ‘정부 눈밖에 났다’는 것을 알린 후 예고된 것에 가깝다.
국제그룹 해체를 둘러싸고 여러 해석이 있으나 당시 양정모(梁正模) 회장이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선의가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외환위기 와중에서 집권한 김대중(金大中) 정부의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는 기업과 산업의 구조조정 등 경제 개혁. 김대중 정부 약 5년을 거치는 동안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낮아지고 계열사간 상호출자를 통한 선단식 경영이 줄어드는 등 한국의 재벌은 ‘대기업 집단’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자동차 반도체 항공기 등 9개 업종에 대해 시도한 대규모사업교환(빅딜)은 대표적인 실패작으로 거론된다. 빅딜의 후유증으로 남아 있는 하이닉스반도체 문제는 아직도 골칫거리다.
비록 ‘선의(善意)’라 할지라도 정부가 기업의 구체적인 경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긴 것. 한양대 경제학과 나성린 교수는 “빅딜 등 5년간의 구조조정에서 ‘시장원리에 따르지 않는 구조조정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점이 재확인됐다”며 “정부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국민의 혈세를 지불하며 배운 소중한 학습경험”이라고 말했다.
▽시장은 권력보다 강하다=문민정부 때 현대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덕분에 정도(正道), 내실경영을 할 수밖에 없었고 기업은 더 단단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에서 현대는 정부와 ‘대북 사업의 파트너’가 되어 많은 일을 벌였다. 결국 맏형뻘인 현대건설이 부도 위기를 맞았고 ‘왕자의 난’에 휩싸이면서 현대는 해체를 면할 수 없었다. DJ정부 출범 초기 정부와 우호적 관계였던 대우도 방만한 투자 끝에 끝내 공중분해됐다.
결국은 ‘시장의 힘’과 ‘기업의 환경적응력’이 기업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사례들이다.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김기원 교수는 “소액주주 권리 강화와 회계투명성의 강화 등 DJ정부의 업적이 적지 않으나 대기업의 개혁과 진화도 시장의 힘 덕분인 측면이 많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시장이 재벌식 기업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 시대가 됐다’는 김 대통령 발언의 본 뜻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장기능이 왜곡되지 않고 작동하도록 해 시장에 적응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자룡기자 bonhong@donga.com
▼정부-재계 가시돋친 말…말…말…▼
정부와 재계가 서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서로 주고받은 ‘가시 돋친 한마디’들에 잘 녹아 있다.
정부측에서 즐기는 단골 메뉴는 ‘문어발’. 대기업이 계열사의 상호출자와 보증을 통해 온갖 업종에 진출, 계열사를 늘려가는 것을 ‘문어발 확장’에 빗댄다.
재벌개혁을 본격 추진한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도 당시 개혁의 슬로건으로 “문어발을 잘라야 한다”고 나섰다.
이에 대해 재계에서는 “세계화 시대에 덩치가 크거나 계열사가 많다는 이유로 기업을 규제하는 나라는 없다”며 “한국에만 있는 이상한 제도는 없어져야 한다”는 ‘세계화론’으로 맞섰다.
그러자 정부측은 ‘고추장론’을 들고 나왔다. “고추장에 대한 식품위생 규제는 한국에만 있다. 왜냐? 고추장은 한국사람만 먹으니까. 총수 한 사람이 수십개 기업의 경영권을 휘두르는 재벌은 한국에만 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한국식 재벌 정책’을 펴야 한다.”
이에 맞서 삼성그룹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95년 4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한국의 기업 경쟁력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며 역습,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외환위기 직후 들어선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이제는 시장이 재벌구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다시 재벌 개혁을 추진했다.
이번에는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朴容晟) 회장이 ‘지네발론’을 펼쳤다. 두산중공업 회장이기도 한 그는 2001년 6월 “컨설팅사 매킨지로부터 ‘자체 핵심 역량을 파악하라’는 교훈을 얻었다”며 “핵심역량이 없으면서 여러 사업을 벌이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이것이 있으면 문어발이 아니라 지네발도 괜찮다”고 말한 것. 박 회장은 다만 “한국 기업들은 사업전망이 조금만 좋다고 하면 너나없이 몰려들어 시장을 망친다”며 “이런 ‘들쥐떼’ 근성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근 재벌개혁 주제가 다시 부각되자 재계는 정부에 대해 ‘제발 너(정부)나 잘 해’로 대응하고 있다. 삼성은 한국에서 공공과 민간을 통틀어 가장 경쟁력 있는 집단이다. 정부의 경쟁력이나 좀 높여라. 이런 논리다.
구자룡기자 bonhong@donga.com
▼97년 재벌개혁 "IMF주문"▼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한국 경제개혁은 절반의 성공일 뿐”이라고 강조한 미국의 한 경제학자는 “가장 시급한 개혁 과제가 뭐냐”는 질문에 “재벌이 선단식 경영을 버리고 정부와의 유착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답했다. “대우가 망하고 현대가 해체되고 LG그룹이 지주회사로 재편됐으니 그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 것 아니냐”는 반문에 “자세한 부분은 잘 모르겠다”고 손을 내저었다.
재벌개혁에 대한 오해는 이처럼 ‘자세한 부분은 모르는’ 외국인의 시각을 그대로 빌려와 적용한 데서 비롯한 것이 많다.
사실 한국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1960∼80년대의 재벌의 성장 신화는 외국 학계에서는 시샘 어린 눈총을 받은 경이적인 성공 사례였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그럴 줄 알았다’는 비판으로 바뀌었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은 1994년 연차보고서에서 정부-재벌-은행이 똘똘 뭉쳐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한국 사례를 ‘동아시아모델’로 치켜세웠다.
‘대마불사’ 논리도 오해라는 지적이 많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한국에서처럼 대마불사의 논리가 철저히 깨진 나라가 없다”고 없다고 반박한다.
“재벌개혁은 IMF의 주문이었다”는 것도 논란거리. 김대중 정부는 재벌개혁에 힘을 싣기 위해 이렇게 선전했다. 하지만 재벌개혁은 한국 정부가 자청한 어젠다였다는 분석도 많다.
정부와의 유착, 선단식 경영 등의 면에서 보면 GE 등 미국의 거대기업군이나 일본의 대기업도 한국의 재벌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럼에도 순환출자를 통해 지분 5% 미만의 주주가 수십개의 기업을 좌지우지하는 소유지배구조만은 한국에서만 나타나며 재벌개혁은 바로 이런 측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철용기자 lc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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