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 타임스도 23일 포천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 보도하면서 한국 정부가 재판 과정에서 정권과 대우와의 유착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해 그의 귀국을 원치 않고 있다는 비난이 있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인터폴이 김 전 회장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음에도 한국 정부는 그를 잡아들이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이 잡지는 보도했다. 포천은 “그가 한국 여권으로 자유롭게 여행을 하며 중국과 베트남은 그를 정부의 손님처럼 대접하고 있다”며 “도피 중인 형사범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망명자처럼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 전 회장은 ‘세계경영’이 지나친 확장이었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이 같은 사업계획을 승인하고 대출해준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규모의 경제’를 위해 형성되지도 않은 시장에 사업을 벌인 후에야 차를 팔 방법을 궁리했다는 것.
김 전 회장은 가격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계열사간에 자산을 이동시켜 그룹 전체의 회계를 분식 처리했음도 시인했다. 그러나 당시 관행상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98년 대우의 단기부채만 135억달러에 달했지만 김 전 회장은 문제가 “단기적인 재정상 문제”라고 판단했다. 그는 대통령이 소집한 회의에서 정부 보조를 요구하다가 관리들과 고성이 오가는 다툼에 이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심지어 98년 뇌수술 직후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러 하노이에 갔지만 관리들이 그를 끝내 막아섰다.
김 전 회장은 “사람들이 5년 안에 내 잘못이 아님을 알 것”이라며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말했다. 잡지는 현재 김 전 회장이 유럽과 아시아 지역을 왕래하면서 자서전 집필에 몰두하고, 골프를 즐기며, 프랑스의 한 엔지니어 회사의 자문역으로 일하며 돈을 벌고 있다고 전했다.
정부 주도의 자본주의라는 낡은 시스템이 종말을 맞은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새로운 규칙에 적응하는 데도 실패했다고 이 잡지는 덧붙였다.
박혜윤기자 parkhyey@donga.com
▼99년 김씨 출국당시 상황▼
“김대중 대통령이 잠시 (외국에) 나가 있으라고 말했다.”
포천지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는 김우중(金宇中) 전 대우 회장의 발언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이는 김 대통령 등 당사자들의 확인이 없으면 밝혀지기 힘든 사안이지만 김 전 회장 출국 전후의 정황을 통해 짐작해볼 수는 있다.
일단 김 전 회장 주변 사람들은 “김 회장이 그와 비슷한 얘기를 몇 년 전부터 간혹 해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김 회장이 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그런 전화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김 회장의 해외체류가 장기화된 데는 자의가 아닌 타의가 많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다만 김 전 회장의 해외체류의 장기화는 그 자신이 대우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경영권에 집착하는 등 상황을 자초한 측면도 있다는 평가다.
그의 장기체류가 시작된 것은 99년 10월16일. 그러나 이때의 출국 명분은 대우그룹 회장 자격으로 중국 자동차부품 공장 준공식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같은달 8일) 전경련 회장직에서 사퇴한 그는 계열사 사장단을 이끌고 18일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자동차 부품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 준공식 직후 다른 대우 사장단은 귀국했으나 그는 “중국 사업장을 더 돌아보겠다”며 이들과 헤어진 뒤 수행비서만 대동하고 따로 움직였다.
이후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11월1일 전화로 대우 회장직 사퇴 의사를 밝혀왔다. 또 11월22일에는 대우 임직원들에게 ‘고별의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에 대한 현 정부측의 ‘출국 종용’ 혹은 ‘귀국 만류’설이 나돌았다. 그가 출국한 시점은 정부와 채권단이 대우에 대한 구조조정 작업에 박차를 가하던 상황. 대우 계열사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가 국내에 머물러 있는 것 자체가 상당한 부담이 됐을 수 있다.
당시 정부나 채권단측에서는 그의 퇴진을 요구했으나 그는 “대우자동차가 정상화된 뒤 물러나겠다”며 버티고 있었다.
전직 대우 임원은 “정부의 퇴진 및 출국 요청을 김 회장이 완강히 거절하던 상황이므로 최고위층에서 연락을 해왔을 가능성도 있다”며 “국민의 정부 출범 초기 정부와 대우의 관계가 꽤 우호적이었다는 사실도 이 같은 추측을 뒷받침한다”고 말한다.
이후 김 전 회장은 대우 분식회계에 대한 조사착수, 자신에 대한 사법처리설 등이 흘러나오면서 귀국할 엄두를 못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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