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미국계 기업 P&G지사장 앨 라즈와니 인터뷰

  • 입력 2003년 1월 28일 18시 55분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시대.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한다.

실현 가능성이야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꿈을 펼치는 것이 공통적인 소망이다. 여기 자칭 ‘다국적 시민’이 있다.

미국계 다국적기업인 프록터 앤드 갬블(P&G) 코리아의 앨 라즈와니 사장(45).

인도계인 그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건너간 뒤 미국 회사의 임원으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미국 시민이다. 그에게 “조국은 어디냐”고 물으면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느 한 나라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

그가 개척해 온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 “국가는 인위적인 경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라즈와니 사장의 ‘다국적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기회의 삶

그의 인생 스토리는 탄자니아편 캐나다편 미국편 한국편 인도편 등 총 5편으로 나뉜다. 이중에서 그의 눈빛에 가장 생기를 돌게 하는 부분은 단연 탄자니아편.

“탄자니아에 대한 기억은 주로 동물에 관한 이야기죠. 집안으로 기어들어온 뱀, 거미, 도롱뇽과 함께 노는 것이 일과였죠. 밤이 되면 하이에나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습니다.”

탄자니아의 야생동물에 대해 열심히 얘기하던 그는 “너무 원시적으로 들리느냐”면서 웃는다.

그의 증조부는 인도에서 탄자니아로 건너간 이민 1세대. ‘카스트’ 제도에서 하층민에 속했던 증조부는 힌두교에서 이스마일리 종파 이슬람교로 개종하면서 새 세상을 찾아 탄자니아로 떠났다. 12세에 8세짜리 신부를 인도에 두고 탄자니아로 온 증조부는 도도마라는 시골 마을에 정착한 뒤 바나나를 따다가 시장에 내다파는 사업으로 기반을 잡았다.

밀가루와 쌀 가공공장을 운영하면서 재산을 늘린 할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라즈와니 사장은 태어날 때부터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9세가 되던 67년에 탄자니아 정부가 지주들의 땅과 재산을 몰수하는 국유화 조치를 취하면서 그의 인생은 험난한 길로 들어섰다. 하루아침에 소작농으로 전락한 그의 가족은 가난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74년 캐나다로 다시 이민길에 올랐다.

“잘사는 나라에 왔다는 기쁨보다는 상대적 빈곤감이 더 컸죠. 양로원에서 식사 준비도 하고 버스 운전사도 하면서 학비를 마련했습니다. 닭공장에서는 산 닭을 잡아서 꼬챙이에 거꾸로 매다는 일을 했는데 도망가는 닭을 잡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고생을 하다 보니 지금도 닭고기라면 지긋지긋합니다.”

●성공하는 삶

캘거리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81년 미국 최대 생활용품 제조업체인 P&G의 캐나다 법인에 입사해 5년 만에 펄프공장 총책임자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제조업에서 벗어나 마케팅에 도전하기로 했다. 92년 미국 신시내티에 있는 P&G 본사로 옮기면서 그의 직급은 일개 과장급인 어시스턴트 브랜드 매니저로 내려앉았다. 경영학석사(MBA)가 넘쳐나는 회사에서 그는 부족한 마케팅 전문 지식을 메우기 위해 수천 편의 TV광고를 보면서 소비자 취향을 간파해 나갔다.

TV광고를 일삼아 보는 버릇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에 와서 몇 달 동안은 퇴근 뒤나 주말에 TV 앞에서 살았다”면서 “한 사회의 소비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광고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주로 종이제품 사업 쪽에서 일한 그는 95∼96년 ‘샤민’이라는 화장지의 브랜드 매니저를 맡아 시장 점유율을 큰 폭으로 끌어올리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미국 시민권도 이때 취득했다. 미국 본사에 진출한 지 6년 만에 마케팅 본부장에 오른 그는 대만지사장을 거쳐 2000년 한국에 왔다.

“한국 문화에 비교적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제 자신의 혈통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인도와 정서적으로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죠. 한국은 눈이 아찔할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그런 변화 속에서 전통을 지키려는 자존심이 대단하다는 점에서 인도와 닮았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

기자와 인터뷰가 있던 날 아침 라즈와니 사장은 청와대의 초청으로 외국기업인 모임에 참석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외국기업 중 하나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주한미상공회의소(AMCHAM) 부회장이기도 한 그에게 사업상 애로에 대해 묻자 “규제 때문에 번거롭다”고 답한다.

“P&G 미국 본사의 제품은 250종이 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진출한 브랜드는 현재 13개밖에 안되죠. P&G코리아로서야 당연히 많은 브랜드를 들여오고 싶죠. 그런데 브랜드 하나 들여오려면 이것저것 지켜야 할 규제들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아예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브랜드 하나 들여오면 공장도 짓고 종업원도 고용하고 해서 한국 경제에 이바지하는 효과가 얼마나 큰데….”

그는 또 브랜드 매니저 출신답게 “한국의 경제력에 어울리지 않게 국가 이미지가 너무 낮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느끼는 것보다 외국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한참 뒤떨어진다”면서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언론을 상대로 국가이미지를 높이는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가장 당황했던 사업 경험에 대해서 묻자 그는 웃으며 “허물없이 친한 척하려다가 퇴짜맞은 적이 많다”면서 “적절하게 소개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고 말한다.

한국에 와서 맨 처음에는 ‘하이!’ ‘헬로!’를 외치면서 격의 없이 다가가려 했으나 상대방이 멀뚱멀뚱 쳐다보거나 외면하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것, 이제는 제3자로부터 소개받은 뒤 명함을 주고받는 격식을 차려야만 정식으로 ‘아는 사이’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격식 차리기 때문에 한국에서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지만 한번 사귄 친구는 오래간다는 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다.

주말이면 역시 인도 출신인 부인과 함께 서울 거리 순례에 나선다는 그는 닭갈비를 가장 맛있는 한국 음식으로 꼽는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도에 대해 물어봤다. 그의 조상은 인도가 싫어서 탄자니아로 떠나 왔고 그 역시 인도에 살아본 적도 없지만 그의 마음의 고향은 인도가 아닐까.

“6년 전 처음 인도 땅을 밟았습니다. ‘다들 나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더군요. 저는 인생의 대부분을 ‘소수’로 살아왔습니다. ‘다수’에 속한다는 안도감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을 인도에서 처음 느꼈습니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라즈와니 사장의 '하인형 리더쉽'▼

‘재미있고 멋진 곳(fun and cool place).’

앨 라즈와니 P&G코리아 사장이 말하는 ‘일터’의 정의다.

그는 한국에 처음 부임한 후 최고경영자(CEO)의 말 한 마디에 절대 복종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보고 적이 놀랐다고 한다.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리더는 군림하기보다는 밑에서 봉사하는 ‘하인형 리더십(servant leadership)’. 그는 “직원들에게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지도 못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외쳐대는 최고경영자(CEO)는 자격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라즈와니 사장이 얘기하는 생산적인 조직문화의 구체적인 조건들을 살펴보자.

▽사장이여, 일찍 퇴근하라=그는 오후 6시가 되면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일이 남았으면 집으로 가져가는 한이 있더라도 6시 정시 퇴근의 원칙은 지킨다. 윗사람이 늦게까지 남아 있으면 직원들은 일이 없더라도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기 때문이다.

▽침묵은 금이 아니다=한국에서 회의는 의견 교환보다 의견 전달인 경우가 많다. 초창기 그가 회의를 소집했을 때 직원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전달사항만 챙겨 가면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보다 못해 의견을 발표하는 직원들에게 3만원씩 주겠다고 공표했다. 이제 회의시간이 되면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간다.

▽열심히 일한 당신, 즐겨라=그가 보기에 한국에는 일중독자가 너무 많다. 정당하게 부여된 휴가를 가는 것조차 미안해하는 분위기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직원들에게 “직장이 아무리 중요해도 가족 다음”이라고 얘기한다. ‘팬틴’(샴푸), ‘위스퍼’(생리대), ‘프링글스’(감자칩) 등의 제품으로 잘 알려진 P&G코리아는 회사이름을 알리기보다는 철저히 개별브랜드 위주의 마케팅 전략을 펼쳐나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라즈와니 사장 부임 후 연 10% 이상의 안정된 성장세를 보여온 P&G코리아는 1000여명의 종업원을 두고 있으며 지난해 66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앨 라즈와니 사장은▼

△1958년 탄자니아 출생

△1974년 캐나다 이주

△1981년 캘거리대 화공과 졸업

△1986년 P&G캐나다 폴리 공장 총책임자

△1992년 P&G 미국 본사 어시스턴트 브랜드매니저

△1998년 P&G 미국 본사 마케팅본부장

△1999년 P&G대만 사장

△2000년 P&G코리아 사장

△가족:부인(대학시절 만났음)

△취미:서울 거리 돌아다니기. 주식 투자(인터넷 통해 미국 주식 거래.

개별 주식보다 인덱스펀드 투자)

△좌우명: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즐겨라(Work Hard, Play 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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