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자유도는 대체로 통화 가치의 안정, 외환 거래, 교역과 관련한 규제 제거 등 거시 경제적인 측면과 대외 거래의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정작 기업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허가 과정의 신속함, 노동 관련 규제, 재산권 보호 등의 측면에서는 평가가 낮다.
규제는 관료주의와 정치적인 이유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느 국가든지 규제를 만들기는 쉬워도 없애기는 어렵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항상 규제 철폐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새로운 규제도 생겨난다. 김대중 정부는 규제를 50% 감축한다는 목표를 제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목표 설정은 행정의 획일화를 초래한다. 목표를 채우기 위해 규제를 제거하다 보면 ‘건수’ 중심의 행정이 나타나고 정작 일선 기업에서는 규제가 줄었다는 것을 체감하지 못한다.
지난 10여년간 규제 철폐는 주로 인허가와 관련된 부분과 대기업이나 중견기업보다는 영세사업자에게 영향을 미쳤던 부분의 규제를 대상으로 했다. 한편 새롭게 등장하는 규제는 주로 산업정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1990년대 초에 추진된 업종전문화 정책이나 외환위기 이후 추진된 빅딜정책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적자생존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장 상황에서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부작용을 낳았다. 업종 전문화정책은 흐지부지됐고 빅딜정책의 후유증은 아직도 크다. 정책 당국은 ‘작은 것은 풀어 선심을 사고 새로 큰 것을 만들어 힘을 과시하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새 정부의 기업 규제정책은 규제의 필요성만을 강조해서는 안 되며 규제의 사회적 비용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실제로 현저하게 주주, 채권자, 소비자의 권익을 침해하는 잘못된 경영 형태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기 전에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새로운 규제를 도입해서는 곤란하다. 환경이나 금융건전성 관련 규제는 필요하지만 인위적인 진입장벽을 만드는 규제는 없어져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별, 공기업과 민간 기업의 차별, 국내 대기업과 다국적 기업간의 차별을 조장하는 규제는 경쟁을 저해하고 궁극적으로 경제의 효율을 저하시킬 수 있다.
또 규제의 내용이 일관되고 투명하게 집행돼야 한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기업 경영자들은 한국이 법과 규제의 개정과 변경이 잦고 법 집행이나 규제의 시행이 불투명하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규제가 자주 바뀌는 것은 환경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이뤄지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사회적 비용에 대한 심도있는 검토 없이 성급하게 규제를 도입해 폐지, 변경하는 경우가 많다. 한 예로 재벌에 대한 출자총액규제는 1998년에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채 폐지됐다. 그러다가 당시 부채비율 200% 달성에 쫓긴 5대 재벌이 대규모 유상증자를 하자 계열사들이 이에 참여하고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과정 등에서 출자비율이 크게 늘자 폐지된 지 1년 만에 부활됐다. 다시 기업들의 반대와 저항에 부닥치자 광범위한 예외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이 이뤄졌다.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든 기업을 퇴출시키는 것이든 정부가 직접 나서 감 놔라 배 놔라 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할 일은 이러한 것이 시장 원리대로 이뤄지도록 원칙과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정부가 직접 칼자루를 휘두르는 기업구조조정이나 일부 산업을 정해 놓고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개발도상국형 방식은 지양해야 한다. 이는 지나친 간섭과 진입장벽을 초래한다. 사외이사제도, 소액주주권 강화, 감사위원회제도, 집중투표제 등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제도적 틀이 마련되었고 이제 제도의 정착을 기다리고 있다. 증권관련 집단소송제 등 주주들의 권익 행사를 위한 법률비용을 낮추는 방안도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금융기관과 주주의 기업감시 기능도 서서히 강화되는 추세다. 기업들의 잘못된 경영은 시장이, 소비자가 자동적으로 규제하는 토양이 마련되고 있다. 정부는 토양을 강화해야지 규제를 강화해서는 안 된다.
규제의 완화나 새로운 규제의 도입 모두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제고한다는 목표에 부합해야 한다. 재무구조의 개선을 위한 정책들은 비록 추진 방법에서는 비판을 받았지만 불과 수년 사이에 국내 기업의 재무구조를 향상시켰다. 경쟁력 제고라는 원칙을 유지한다면 ‘규제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비판은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표 공동집필
성소미 한국개발연구원 기업정책팀장
조홍래 동원증권 부사장
▼공정거래법 개선방안▼
미국에서는 반독점법에 의해 거대 기업이 사정없이 쪼개지거나 제재를 당한 사례가 심심찮다. 그러나 경영혁신과 신기술 등의 경쟁력으로 독점적인 지위를 갖게 된 기업과 공정거래 당국이 맞붙었을 때는 항상 기업이 승리했다.
무조건 독점이냐 아니냐, 시장점유율이 몇 %냐를 가지고 그 기업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독점적인 지위가 소비자에게 해를 끼치는지 이로움을 주는지를 가지고 규제를 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그 기업이 거대 기업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경로를 통하여 그런 위치에 도달했는지, 또 현재의 기업 행태가 경쟁이나 소비자 후생을 저해하는지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공정거래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대기업을 일괄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의 후생을 최대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 활동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 공정거래 규제 당국의 분석력과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
선진국 중 기업의 출자총액을 제한하고 내부거래를 통제하는 국가는 찾기 힘들다. 출자총액과 상호출자에 대한 규제가 한국 경제의 성장 과정에서 빚어진 독특한 재벌 구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에는 대부분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담당할 주체의 발목을 불합리하게 잡아서는 안 된다.
불공정행위를 단속한다는 명분은 좋지만, 불필요하게 자주 실시되는 내부거래 조사는 실질적인 정책 효과보다는 기업 경영의 어려움을 야기하는 것이 현실이다.
현재 공정위가 보유하고 있는 계좌추적권, 영치권, 현장조사권 등은 지나치게 막강한 권한으로 평가되고 있다. 증권거래법, 법인세법과 같은 다른 정책 체계와 중복되는 부분도 개선돼야 한다.
내부거래에 대한 조사가 기업과 기업인을 예비 범법자로 간주하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공정거래 정책은 일반 범죄를 단속하는 것과는 다르다. 고도의 정책적인 판단이 필요하고 금융, 세제 등 다른 정책 분야와의 조화가 필수적이다.
조홍래 동원증권 부사장
▼영국의 경우▼
유럽 국가 중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해온 모델로 꼽혀온 영국이 토니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 집권 이후 조세부담과 규제의 증가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지난해 말 ‘영국은 유럽의 또 다른 환자’라는 기사에서 “세금 부담과 기업규제는 급증하고, 노동생산성과 외국인투자는 크게 떨어져 독일과 비슷한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노동 생산성은 97년의 절반 수준이며, 전세계 외국인직접투자(FDI) 중 영국으로 들어간 투자비중도 90년대 39%에서 지난해에는 22%로 축소됐다.
런던의 리서치기관인 모리(MORI)와 영국산업협회(CBI)가 공동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영국 기업 경영자의 67%는 5년 전에 비해 각종 규제 때문에 기업 환경이 악화됐다고 응답했다. 보수당의 마이클 하워드 의원은 “이 정부는 세금을 올리고, 정부 지출과 개입을 늘리고, 정부 실패의 사례도 늘렸다”고 비난했다.
1996년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5% 수준이던 정부지출이 2006년이면 42%에 달할 전망. 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이 증가해 1997∼2005년 기업들이 추가로 내야 할 세금은 740억달러로 추정된다.
또 2년 전 마련된 유럽연합(EU)의 ‘사회협약’에 따라 근로시간 등 고용조건에서부터 제품 포장 설명서까지 세세한 규제가 늘었다. 노조 대표가 기업 이사회에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등의 노동법 개정으로 기업이 연간 추가로 들일 비용은 약 240억달러로 추정된다. 반면 통화는 유로권에 속해 있지 않아, 파운드화의 높은 가치 때문에 영국 기업의 수출 경쟁력은 떨어지고 있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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