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경영인과의 파트너십 경영체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젊은 재계 총수가 배임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주요기업에 대한 부당내부거래를 조사하겠다고 밝혀 서슬이 시퍼렇다. 당국이 빼어든 ‘전가(傳家)의 보도(寶刀)’ 앞에 당하는 민간기업은 속수무책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확정한 새 정부의 정책과제도 재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금융계열사 분리 청구제,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 고용허가제, 증권 집단소송제 등등.
‘개혁’이라는 삭풍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2003년 2월24일 한국 재계의 초상(肖像)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과 기업투명성 제고라는 새 정부의 개혁정책 방향은 틀리지 않다고 본다. 세금 없는 재벌의 대물림과 지배력을 부당하게 행사해 온 일부 재벌들의 관행을 고치겠다는 의지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도 뒷맛은 개운치 않다. 개혁순결주의자들이 이견의 목소리를 반(反)개혁으로 매도하는 공포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논리적인 반론을 펼치던 재계가 하루아침에 조용해진 것이 그 증거이다. 새 권력층이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과는 같은 배를 탈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마당에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중국에서 문화혁명 때 개혁 논리는 명쾌했다. 내가 아닌 너, 인민이 아닌 기득권층, 그리고 악습타파와 공평분배를 완성하려는 ‘홍(紅)’에 대립각을 세운 실사구시와 경제우선의 ‘전(專)’은 개혁의 대상이었다. 사회주의 이념완성을 위해 타파돼야 할 인민의 적(敵)이었다.
‘반대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기존의 것은 모두 깨부수라(造反有理 破舊入新)’며 직접 국민감정에 호소했던 ‘홍’의 개혁지상주의는 들불처럼 타올라 중국전역을 뒤덮었다.
“2000만명의 아사자가 생기는 현실에서 빈곤을 가중시키는 급격한 개혁보다는 식량증산과 공장가동률을 높이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안타까워하던 류사오치(劉少奇) 주석은 인민의 적으로 몰려 참혹한 운명을 맞아야 했다.
‘국민’을 직접 대상으로 한 개혁정치의 승리라고 흐뭇해하던 개혁세력 ‘홍’은 결국 ‘중국경제를 30년 뒤로 돌려놓았다’는 비판을 받으며 국민의 배를 더욱 굶주리게 했다.
국내외 경제여건이 좋지 않다. 월별 무역수지가 3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로 돌아섰고 실업률도 크게 뛰어오르고 있다. 국제유가는 치솟고 있고 물가불안도 심상치 않다. 가계지출도 4년 만에 줄었다. 더블딥 현상이 곧 닥칠 것이라는 불길한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경제를 이끄는 가장 핵심적인 축인 기업에 대한 문화혁명식 개혁추진은 여전하다. 경제주체의 불안과 경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밤사이에 내린 봄비가 소리 없이 대지를 적시는 그림 같은 개혁은 기대난망인가. ‘홍’이 걱정스럽다.
반병희 경제부 차장 bbhe4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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