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말 환란을 겪은 후 우리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대거 수용했는데 그 내용은 사실상 아메리칸 스탠더드 일색이다. 그 결과 미국 자본주의의 주요한 특징이 우리 경제의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외형 키우기를 지양하고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자, 전근대적인 재벌 체제를 개혁해서 경제력 집중을 해소하자, 그간 기업금융을 은행에 맡겨 막대한 부실을 초래했으니 이젠 자본시장을 한껏 키우자, 언제든 구조조정이 가능하도록 노동시장을 유연화하자는 것 등이 그 주된 내용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 영국 등 앵글로색슨계를 제외한 다수의 선진국에선 아메리칸 스탠더드에 대한 열기가 빠르게 식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미국식을 앞서 추종했던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경영 성과가 그다지 신통치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반성에 발맞춰 해외 학계에서는 나라별로 차별화된 제도 경쟁력을 중시해야 한다는 관점이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한 예로 첨단산업 위주로 획기적인 기술혁신을 꾀한다면 미국식 자유경쟁시장 제도를 대거 수용할 필요가 있지만, 전통 산업 위주로 현장밀착형의 기술혁신을 꾸준히 도모해 가려면 대륙식의 조절적인 시장 제도를 따르는 편이 낫다는 지적이다.
▷국가경쟁력 이론으로 잘 알려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포터 교수도 같은 맥락에서 미국식 제도가 결코 만능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본시장의 단기성과주의, 과도한 소유분산 유도로 인해 미국 기업들이 경영의 장기적 시계를 상실했고, 그럼으로써 경쟁력 확충에 꼭 필요한 시설, 연구개발, 조직개발, 인적자원의 투자가 위축되고 말았으며, 나아가서는 빈부 격차로 얼룩진 왜곡된 경제성장으로 귀결되었다고 진단한다. 혹 지난 5년간 계속 골이 깊어지고 있는 우리 경제의 뚜렷한 투자 위축의 징후가 무모한 미국식 제도 이식에 따른 것은 아니었는지 찬찬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찬근 객원논설위원·인천대 교수 ckl1022@inche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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