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 경제를 둘러싸고 있는 가장 큰 위험요소는 미국-이라크 전쟁, 북한 핵문제, 세계경제 회복 지연 등 대외변수다. 하지만 △기업의 회계부정 △가계부채 부실 급증을 비롯한 금융부실 △새 정부의 정책 불확실성 등 국내에 잠복해 있는 ‘복병’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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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전문가들은 “해외 요인과 달리 국내 요인들은 정부나 해당 경제주체들이 의지만 가진다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라며 “대외 요인이 불안할수록 조절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리스크를 분산할 정책이 필요〓최근 일련의 사태로 ‘위기’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은 여러 위험요인이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경제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소비 투자 무역수지 등 주요 지표가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여기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검찰의 SK 수사결과 발표는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이어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가산금리와 환율이 요동쳤다. 종합주가지수는 530대로 내려앉았다.
박병원(朴炳元) 재경부 경제정책국장은 “상당수의 외국인투자자들이 한국 기업의 회계부정이 SK만의 일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며 “기업과 금융부문의 구조조정 방향은 이미 제 궤도에 올라 있어 기업이나 시장에 지나친 충격을 주지 않도록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고건(高建) 국무총리나 김 경제부총리가 “시장이 감내할 수 있는 속도로 개혁을 하겠다”며 개혁 작업의 ‘속도 조절’을 언급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금융부문은 신속하게 대처해야〓금융시장은 한 곳이 부실화하면 그 여파가 급속히 확대돼 파급효과가 엄청나다는 게 특징이다.
김석동(金錫東)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1국장은 “외국인들이 국내에서 갑자기 돈을 빼 가면 외환보유액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며 “이는 환율과 금리를 자극해 결국 가계부문의 부실까지 연결되는 등 금융시스템이 민감하게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보유 시가총액은 작년 말 950억달러 수준에서 3월 초엔 650억달러까지 급감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국제결제은행(BIS) 요시쿠니 신이치 아시아태평양 대표는 “한국의 은행들이 가계대출 비중을 급격히 늘리고 있는데 경제상황이 더 나빠지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고 경고했다.
금감위는 금융부문 리스크와 관련해 가계대출 금리, 카드 연체율 등을 면밀하게 점검해 연착륙을 이루는 데 금융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택대출 만기구조의 장기화, 대환대출 확대, 카드사 부실채권의 조기 상각 유도 등이 세부방안이다.
▽정부 정책혼선도 가세〓두산중공업 파업사태 해결 직후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집단간 이해관계에 따라 발생하는 갈등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조정해야 할 본연의 임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에 적극 개입할 움직임이다.
이에 대해 기업들, 특히 한국 투자의 가장 큰 걸림돌로 노사문제를 꼽고 있는 외국인투자자들은 ‘심각한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다. 정부가 그동안 노사 모두에게 ‘법과 원칙’을 지키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해 왔으나 이번 사태 해결 방식을 보면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정부 조정에 노사관계를 맡겨야 한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 밖에 법인세 인하, 경기침체에 대한 적자재정 논란 등 최근 나타난 몇 가지 ‘엇박자’도 시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김동원기자 daviskim@donga.com
▼위기의 가계부채▼
적정한 가계부채 규모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가계 빚이 너무 빨리 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정부와 민간 전문가 사이에 이견이 거의 없다.
한국의 가계부채 총액은 지난해 말 현재 439조원으로 1년 동안 30%(100조원) 가까이 늘었다. 가구당 가계 빚(4인 기준)은 2915만원으로 3000만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여기에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채(私債)까지 포함하면 가계부채 규모는 5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가계부채가 이처럼 급증한 것은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은행들이 가계의 부동산 담보대출에 주력해온 데다 무절제한 신용카드 사용 등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헤픈 씀씀이 때문이다.
가계 빚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상환부담이 커져 연체율증가→개인파산증가→금융기관 부실화로 이어지는 ‘금융대란’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부동산 가격이 급락하고 금리가 올라 빚을 갚지 못하는 가계가 늘면서 신용경색 현상이 벌어지는 상황이다.
은행에서 돈을 빌린 사람들은 이미 금리 부담이 커지고 있다.
SK글로벌 사태로 시장금리가 급등하면서 올 들어 연 5% 후반으로 떨어졌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6%대 후반으로 상승했다. 주택담보대출의 기준금리가 되는 양도성예금증서(CD) 3개월물 금리가 SK글로벌 사태이후 0.5%포인트 이상 올랐기 때문.
대부분의 가계가 아파트 등 주택을 구입할 때 담보대출을 받는 점을 감안할 때 주택담보대출 금리 상승은 부동산 가격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정책당국은 이 같은 가계 빚이 소비심리 악화와 신용불량자 양산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택담보대출 만기연장 등 가계부채 연착륙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대응 못지않게 각 가계도 소득 및 자산 규모에 맞게 소비와 빚을 줄이는 쪽으로 리스크 관리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신한은행 한상언(韓相彦) 팀장은 “대출금리가 지금처럼 낮은 수준으로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다”며 “현재의 소득으로 원리금을 여유 있게 갚을 수 있도록 대출금을 가급적 줄이고 빠듯하게 대출을 받은 사람들은 지금부터라도 대출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기업 연착륙 방안은▼
내수 위축과 금융시장 불안, 원유 등 원자재 가격 급등락으로 기업경영도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러나 기업이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위험을 관리한다면 ‘예기치 않은 부도’와 같은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최근 기업이 처한 위험의 특징은 대외 내수 금융 등 여러 부문에서 복합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점. 따라서 각각의 부서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최고경영자(CEO)가 중심이 돼 전사적(全社的)으로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계명대 강태훈(姜泰勳·재무관리) 교수는 “우선 대외, 내수, 금융부문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부정적 시나리오를 토대로 현금흐름을 예측해봐야 한다”면서 “일시적인 자금 부족이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면 들어올 돈과 나갈 돈의 시기를 미리 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선물 등 파생상품을 이용한 위험 회피(헤지)도 고려해볼 것을 권했다. 금융시장에 헤지를 할 만한 마땅한 금융상품이 없을 때는 금융기관이 제공하는 맞춤형 헤지서비스를 적극 이용하라는 것. 강 교수는 “헤지를 하려면 반드시 비용이 따른다”면서 “CEO들이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실무자들의 건의를 묵살했다가 회사 전체가 큰 피해를 당한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 기업들은 대다수가 환율 급상승에 따른 피해를 고스란히 떠 안고 심한 경우 부도를 냈다. 하지만 일부 기업은 환(換)위험 헤지를 통해 수백억원의 이득을 보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내수 위축의 속도가 빨라질 가능성에 대비한 군살빼기 계획도 미리 세워둬야 한다”고 조언한다. 체감경기에 이어 최근 통계지표상의 경기도 하강국면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 본격적인 경기침체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해석이 적지 않다.
서울대 국제지역원 문휘창(文輝昌·경영전략) 교수는 “불경기에 군살빼기는 필요하지만 인적자원과 기술에 대한 투자 등 기업경쟁력과 밀접한 지출을 줄여서는 안된다”면서 “경쟁력이 없는 기업은 단기적으로 아무리 대비를 잘해도 궁극적으로 위험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문 교수는 또 “환율이나 유가 등 가격변수는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것이 속성”이라면서 “상황을 비관적으로만 해석, 지나치게 움츠러드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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