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14일 결혼한 신혼부부인 남자와 여자의 손놀림은 서로 달랐다. 남자의 손길은 전략적이고 부드러웠던 반면, 여자의 손길은 거칠고 원시적이었다.
“연속 돌려차기”를 외치며 남자가 왼손으로 ‘→,→,→,→’를 누른 데 이어 오른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반면 여자는 “아싸∼, 어떠냐!” 손끝에 닿는 대로 ‘→←#↑@→%&↓○△#□○×△’ 여러 버튼을 마구 눌러댔다.
두 캐릭터가 맞서서 격투기를 벌이는 게임인 ‘철권’에서 여자가 10번째 승리를 거두자 남자가 화를 냈다.
“나 안 해! ‘전략’을 가지고 재미있게 해야지 이게 뭐냐?”
남자의 볼멘소리에 여자는 “이기기만 하면 되지 무슨 소리!”라고 맞받아친다.
‘씩씩’거리던 남자.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철권 몇 판 이겼다고 좋아하냐? 넌 나한테 져서 결혼한 거야. 기억 나?”
▽호수공원에서=남자와 여자는 99년부터 캐릭터 e메일을 서비스하는 벤처기업에서 일했다. 연극영화과 출신인 여자와, 일본어와 컴퓨터를 복수 전공한 남자는 다른 한 남자와 이 회사의 마케팅팀 소속이었다.
2000년 5월. 3개월간의 밤샘작업에 지친 세 사람은 어느 토요일, 경기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에 가자고 의기투합한다. ‘반나절의 일탈’에 동의한 여자와 남자는 물 속에서 이글거리는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른 한 남자는 그 옆에 누워 코를 골았다.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지선씨랑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지하게 사귀어 볼까요?”
여자가 짧게 대답했다. “그러죠, 뭐.”
남자는 생각했다. ‘너랑 결혼하고 싶어. 열심히 일한 뒤 야전침대에 쓰러져 자는 네 모습은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웠어.’
여자는 생각했다. ‘누구든지 같이 몇 달씩 밤을 새우면 정 드는 거지 뭐.’
누워 코를 고는 남자는 생각했다. ‘빨리 끝내라. 내 코 다 헌다.’
여자는 몰랐다. 두 남자가 동창 사이라는 것을.
▽중고차 시장에서=“안양에서 강남역까지 버스 타고 다니기 힘들지 않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남자가 물었다. “아니, 뭐 습관이 돼서 괜찮아.” 여자가 대답하자 남자가 제안한다. “그러지 말고 우리 돈 반반씩 내서 중고차 한 대 사자. 그 차는 그냥 네가 몰고 다녀.” 여자가 반색한다. “그래도 돼? 그럼 나야 좋지.”
99년형 경차 마티즈를 중고차 시장에서 400만원 주고 샀다.
여자가 말했다.“고마워서 어떡하지?” 남자가 말했다. “뭘 이런 걸 갖고 그래?”
여자가 생각했다. ‘야호, 출퇴근 시간 반으로 줄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넌 이제 코 꿰었다. 뇌물은 반드시 효과를 발휘한다고 병법에도 나오거든.’
▽차 속에서=“지선씨 퇴근해?” “우리 오늘은 그냥 집에 가자. 피곤해.” “그러면 나 안양까지만 좀 태워다 줘라. 친구 집들이하거든.”
퇴근길 막히는 차 속에서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모두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 또 컴퓨터게임 스노보드 인라인스케이트에 열광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윽고 인덕원 사거리에서 남자가 내렸다.여자가 말했다. “잘 가,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남자가 말했다. “나 내일 늦으면 다른 사람들한테 좀 둘러대 줘.”
여자가 생각했다. ‘이 부근에 친구들이 꽤 많이 사네. 고향이 여긴가.’
남자는 생각했다. ‘아, 답십리 집까지 또 언제 가냐.’
지나가던 택시 운전사가 생각했다.
‘또 저 손님이네.’
▽회사에서=남자와 여자는 전 직장을 나란히 떠나, 2000년 12월 나란히 NHN에 입사했다. 송재화 인사팀장과 채유라 마케팅팀장은 강남역 부근에서 두 사람이 손잡고 가는 모습을 일찍이 목격했으나, 두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사실을 서로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결혼 두 달 전 남자가 송 팀장과 채 팀장을 찾아갔다.
“저희 좀 있다 결혼해요.”
남자가 생각했다. ‘완전범죄야.’
▽그래서=여자가 말했다. “오호라, 자기 그렇게 치밀하게 ‘작업’ 한 거였어?”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당근이지, 이 사람아. 내가 ‘전략’ 짜느라고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했는 줄 알아? 철권 몇 판 이겼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니까.”
놀란 표정의 여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자기야, 그런데, 아까 철권할 때, 내가 정말 아무거나 막 누르는 것처럼 보였어?”
나성엽기자 cpu@donga.com
▼"TV는 PDP라야 해"▼
2002년 12월 14일, 함성욱 장지선씨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집으로 왔다. 결혼식장이 가까웠기 때문에 호텔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장씨가 속눈썹을 떼어낼 때쯤 함씨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 TV로는 게임 못해.”
“왜? 그것도 29인치잖아.”
함씨는 다짜고짜 장씨의 손을 잡고 현대백화점으로 99년형 마티즈를 몰았다.
“PDP TV여야 해.”
백화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가전 매장에서 대형 PDP TV의 값을 보고 지하 주차장에 서 있는 마티즈를 떠올렸다. TV 값이 새 차 한 대 값과 비슷했던 것. ‘차를 새로 사느냐, 아니면 TV를 사느냐’, 함씨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PDP TV를 구입했다.
집에 있는 비디오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2’는 고화질과 입체음향을 지원하는데 ‘브라운관 TV’로는 이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게 함씨의 주장.
장씨는 두말 않고 남편의 뜻을 따랐다. “생활하면서 제대로 된 게임시설은 꼭 필요하다는 남편의 뜻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는 그는 “큰 차를 샀으면 비싸진 연료비 때문에 오히려 골치가 아팠을 것”이라며 웃었다. 함씨 부부가 갖추고 있는 ‘게임시설’은 다음과 같다.
▼함씨부부의 게임장비▼
○LG 전자 엑스캔버스 42인치 PDP TV670만원
○소니 플레이스테이션2와 컨트롤러 두 개,
경주 게임용 스티어링휠과 페달50만원
○소니 노트북 ‘바이오’278만원
○함씨가 직접 조립한 PC 펜티엄4 2.5GHz
(512MB 메모리, 80GB 하드디스크)·130만원
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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