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전쟁’에는 미국 영국을 비롯해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상당수 국가가 ‘목숨을 걸고’ 나섰다. ‘경제 전쟁’의 주요 원인이 석유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총알이 오가는 실제 전투의 이면에선 달러와 유로화가 한판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또 각국 기업들은 전후 이라크 재건사업을 염두에 둔 ‘로비 전쟁’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 ‘검은 황금’을 둘러싼 다툼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얻는 가장 큰 이득은 ‘국제 유가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라크의 석유 매장량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 규모. 미국은 이라크의 석유를 증산해 유가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미국이 유가를 떨어뜨리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01년 말 현재 알래스카 지역을 제외한 미국의 석유 매장량은 304억 배럴로 현재의 생산 속도로 지속될 경우 10.7년이면 고갈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동 지역에서 앞으로 더 많이 석유를 수입해야 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미국이 원유 수입의 6분의 1을 의존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날로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는 점. 미국의 친 이스라엘 정책으로 이미 사이가 좋지 않던 두 나라는 9·11테러범 가운데 15명이 사우디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한층 더 멀어졌다.
따라서 미국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이끌면서 유가를 조절하는 사우디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라크 유전 장악이 최선이라는 계산을 했다는 것이 국제 석유시장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이와 관련, AFP통신은 “미국이 이라크 석유를 장악하면 이라크로부터 석유를 공급받는 터키와 시리아는 물론 석유 수입에 재정을 의존하고 있는 OPEC 국가들까지도 미국의 견제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미국이 승리할 경우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될 나라는 러시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박복용 연구위원은 “재정 수입의 절반을 석유 수출로 얻고 있는 러시아에 유가 하락은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국제 유가가 배럴당 1달러 하락하면 러시아의 재정 수입은 연간 10억달러 줄어든다. 러시아가 강도 높게 반전을 외친 것도 이 때문으로 해석된다.
러시아는 유가 하락으로 인한 손실 뿐만 아니라 이라크 유전 개발권이라는 막대한 이권을 놓칠지 모른다는 점에서도 조바심하고 있다. 이 점에선 현재 70억달러 규모의 유전 개발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프랑스도 같은 입장이다. 91년 걸프전 이후 미국 영국과 첨예하게 대립해온 이라크는 유전 개발 사업에 미국 영국을 제외하고 프랑스 러시아 등의 석유 회사들만 참여시켜 왔다. 이 때문에 프랑스 등이 이번 전쟁에 반대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국이 승리하고 이라크에 새 정권이 들어서면 기존의 석유 개발권을 무효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과 함께 전쟁에 뛰어든 영국은 91년 걸프전 이전까지만 해도 이라크 석유 사업에 깊이 관여했다. 영국은 이번 전쟁을 통해 ‘실지(失地)’를 회복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 달러 vs 유로화
미국이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몰아냄으로써 얻고자 하는 또 다른 경제적 목적은 ‘달러 헤게모니의 유지’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캐나다 외교관 출신으로 J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등 국제정치 이면을 분석한 책을 내온 UC버클리대의 피터 데일 스콧 명예교수(영문학)는 최근 교내 웹사이트에 게시한 기고문에서 “미국은 군사력으로 달러 우위를 지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달러의 우위를 지키려는 미국의 의도 역시 석유와 연관이 있다. 수십년간 석유 거래의 결제 수단은 오직 달러였지만 최근 유로화가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특히 이라크는 2001년부터 석유 거래에 유로화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른 OPEC 회원국들도 유로화 사용을 고려하고 있다. 만일 OPEC가 결제 수단을 유로화로 바꾸면 석유 수입국들은 달러를 팔고 유로화를 사들이게 된다. 이미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유로화 보유 비중을 늘리고 있는 상황에서 유로화 선호 추세가 가속화할 수 있는 것. 그렇게 되면 달러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달러의 가치 하락은 달러로 표시된 주식 채권 부동산 등 미국의 자산 가격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게 달러의 위기에 직면한 미국은 세계 최대의 교역품인 석유 거래에서 유로화를 밀어내고 달러의 지위를 고수하려 한다는 분석이다.
달러와 유로화의 힘겨루기에서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이번 전쟁에 반대하는 이유를 읽을 수 있다. 유럽 국가들로선 석유 거래에 유로화가 사용되는 것을 두 손 들어 반기고 있다. 같은 통화로 거래되므로 환(換)리스크를 줄일 수 있고 유로화의 가치 상승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으로선 동유럽 10개국이 추가로 유럽연합에 가입해 유로화 통용이 증가하는 2004년이 되기 전에 서둘러 행동을 취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분석했다.
● ‘전리품’을 차지하라
전쟁발발을 전후해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산업계에선 또 다른 전쟁이 전개되고 있다. 전후 이라크 복구 사업에 참가하기 위한 글로벌 기업들의 로비전이 시작된 것. 파이낸셜타임스는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기업들간 로비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고 표현했다.
이라크 복구 사업의 규모는 최소 1000억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전후 사업에 가장 기대를 거는 쪽은 미국과 영국 기업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전쟁이므로 ‘전리품’ 역시 대부분 두 나라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정부는 이미 자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재건 사업에 참여할 기업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전쟁으로 파괴된 각종 석유 산업 기반 시설의 복구, 낙후된 유전시설의 재정비, 각종 장비의 제작 공급 등 다양한 관련 사업에 미국과 영국의 기업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전쟁에 반대해온 나라들은 사업 참여에서 배제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독일의 한 경제연구소는 “전쟁 전 미국과의 외교적 입장 차이로 인해 종전 후 이라크 재건 프로그램에 독일 기업이 참가할 가능성이 희박할 것 같다”는 비관적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프랑스 역시 같은 처지다.
이 같은 분위기에 따라 각국의 업체들은 워싱턴으로 로비스트를 파견하는 등 ‘파이 나눠 먹기’에 동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특히 각국의 메이저 석유 업체들의 로비전이 가장 치열하다.
프랑스와 독일 정부도 전후 처리과정에서 자국의 기업들이 ‘왕따’ 당할 것을 우려해 미국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직후인 20일 두 나라 정부가 약속이나 한 듯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라”고 주문한 대목에 주목했다.
직전까지 반전을 강하게 외쳤던 데서 크게 물러난 입장이라는 것.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우리는 다자주의와 국제법을 지키고자 할 뿐 평화주의자도, 반미주의자도 아니다”고 말한 사실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됐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역시 “독일과 미국 관계의 핵심은 위험한 상황에 있지 않다”고 강조했고, 이고리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미국은 파트너로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전을 외쳤던 이들 나라의 입장 변화는 ‘명분은 명분, 실리는 실리’라는 국제 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실제 전장보다 ‘경제 전쟁’이 우선하는 시대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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