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3월 1일 서배너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창립 총회가 열렸다. 오늘날 국제통화제도와 국제금융시스템이 공식 출범하는 역사적인 자리였다. IMF 탄생을 주도했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영국대표로 참석했다.
회의장을 뛰쳐나와 기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던 케인스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후세(後世)의 과장된 얘기겠지만 기차의 유리창은 성에가 낀 것처럼 그의 눈물로 얼룩졌다고 한다.
케인스가 만든 IMF 초안에는 기축 통화가 파운드와 달러였다. IMF본부도 미국과 영국이 아닌 제3의 장소였다. 그런데 결과는 기축통화-달러, IMF본부-워싱턴이었다. 의결권도 돈을 많이 낸 미국에 집중됐다.
당대 세계 최고의 경제이론가였던 케인스, 그리고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귀향한 케인스는 분에 못 이겨 시름시름 앓다가 한달 뒤 세상을 떠났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미국은 세계경제에서 경쟁자 없는 1인자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런 미국이 최근 한국의 대미(對美) 반도체 수출업체들에 대해 고율(高率)의 상계관세를 물리겠다고 예비 판정했다. 미국 반도체업체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지난주에는 세계무역기구(WTO) 7차 도하개발어젠다(DDA) 규범 협상 그룹회의에서 ‘보조금규제’ 강화를 골자로 하는 제안서를 제출했다. 한국 반도체업체를 겨냥한 ‘확인사살’ 차원이다. ‘구조조정 중인 부실기업(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출자전환을 보조금 지원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하지 않으냐’고 항변해도 미동조차 않는다.
그뿐만 아니다.
종전을 눈앞에 둔 미국은 각국에 대해 이라크 채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건설 등 한국 기업들도 13억달러(공사 미수금)를 날려야 할 판이다. 억울하지만 이것이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과거 슈퍼 301조에 가장 많이 혼이 난 나라가 한국이다. 이번에도 몇 년간의 시간여유가 있었는데도 미적미적 대응하다 이 지경이 됐다.
그런데도 정권은 아직도 대미(對美)관계를 말할 때 ‘평등’과 ‘자주’ 등의 ‘과장된 명분’에 집착하고 있다. ‘미국에 당당해야 우리가 당하지 않는다’는 말도 나온다. 생각 없이 듣기에 이보다 더 달콤한 말이 어디 있을까.
미국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치열한 생존경쟁의 세계경제무대는 정글과 같다. 현실을 무시한 ‘과장된 이념’은 통하지 않는다. 반전 국가였던 프랑스와 러시아가 갑자기 미국에 추파를 보내는 것을 보라.
노무현 대통령이 곧 미국을 방문한단다. 이번만은 화려한 정치적 수사(修辭)로 가득한 ‘TV용 쇼’가 아니라 경제적 실익을 얻어내는 자리이기를 바란다. 케인스의 눈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것은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 한국이 살길이다.
반병희 경제부차장 bbhe42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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