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외국계 크레스트증권이 단기간의 전격적인 주식 매입을 통해 SK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인 SK㈜의 최대주주로 올라서면서, 우리나라 재벌들이 외국인에 의해 간단히 인수합병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법적으로 금지돼 있던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이 합법화된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공룡으로 통하지만 국제적 기준으로 보면 아직도 규모가 작은 국내 재벌들이 외국계 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출자총액제한 제도 때문에 많은 수의 재벌 핵심 기업들이 계열 기업에 대해 갖고 있는 지분만큼의 의결권도 행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재벌들이 외국계 자본에 의해 인수합병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선진국, 적대적 M&A 적극 방어 ▼
우리나라 재벌들이 개혁 대상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그들의 이 같은 사정은 별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특히 SK㈜처럼 분식회계 등 여러 탈법적인 행위로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경우에는 차라리 외국계 자본에 인수되면 그 기업의 투명성이 제고되고 더 효율적인 경영을 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다.
크레스트증권은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 그 모기업인 소버린은 모나코라는 유명한 세금 도피처에 위치한 펀드들로서, 도덕성을 운운할 처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SK㈜의 최대주주가 되자마자 한국에서 도덕 경영운동의 상징처럼 돼 있는 참여연대를 사전 접촉한 것도 앞으로 다가올 인수 전쟁에서 도덕성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우리의 대기업들이 통째로 외국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걱정하면, 많은 사람들이 요즘처럼 세계화된 세상에서 자본의 국적을 운운하는 것은 낡은 민족주의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자본은 국적이 없는 것인가.
세계화의 진전으로 이제 국적을 초월했다는 초국적 기업들의 경우에도 전략수립, 연구 개발, 브랜드 관리, 고부가가치 상품 생산 등 핵심 기능은 아직도 거의 전부가 본국에서 행해지고, 최고경영진도 대부분 본국인이다. 1998년 독일의 다임러 벤츠그룹이 미국의 크라이슬러사를 인수했을 때 처음에는 양사의 동반자적 결합이라며 이사회를 같은 수의 독일인과 미국인으로 구성했지만, 합병 후 4년이 지난 지금은 이사 14명 중 미국인은 2명뿐이라는 사실은 그 좋은 사례다.
선진국에 기반을 둔 투자기금들의 경우도 이들이 대주주가 되면 한국 같은 후발국 기업은 성장과 경쟁력에 엄청난 견제를 받게 된다. 이들의 주 고객층이 고령화되고 안정화된 선진국 국민이어서 후발국 기업들이 행하는 적극적인 투자보다는 배당을 높이는 방식의 경영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본에 국적이 없다고 외치는 선진국들도 자국 경제의 대외 방어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면 서슴없이 외국자본을 규제해 왔다는 사실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자유시장 경제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는 미국도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외국인 투자를 엄격히 제한했다. 해운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금지했고, 외국인의 토지소유와 채광권 벌목권 등을 엄격히 규제했으며, 은행의 경우 미국에 영주하지 않는 외국인 주주들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
▼‘재벌 노리는 外資’ 대책 시급 ▼
지금도 프랑스 독일 스웨덴 스위스 네덜란드 등 대부분의 유럽 선진국들에서는 주요 대기업의 주식을 정부나 정부관련 금융기관이 일정 부분 소유해 안정 지분 확보를 도와주거나, 차등 주식의 발행을 허용해 비핵심 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등의 방법으로 외국 자본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을 규제하고 있다.
우리 재벌들은 이제 하루아침에 지배권을 박탈당할 수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말뿐 아니라 진정한 국민의 기업으로 다시 태어날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이같이 반성하고 사회적 통제를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서 우리 정부도 대타협의 정신으로 현재의 재벌 정책을 재검토해 재벌의 지배권을 안정시켜줘야 한다. 한마디로 ‘자본에 국적이 없다’는 말은 강대국 자본들이 지어낸 신화(神話)이기 때문이다.
장하준 영국케임브리지대 교수·고려대BK21 교환교수·경제학
서영아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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