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적대적 M&A' 무산 이후 파장과 외국사례

  • 입력 2003년 4월 14일 18시 43분


SK글로벌 사태로 최태원(崔泰源) 회장이 자신의 계열사 지분을 채권단에 모두 담보로 내놓으며 시작됐던 SK㈜의 경영권 문제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외국 동일인 지분이 10%를 넘으면서 계열사의 의결권 제한이 풀려 경영권 방어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적대적 인수합병(M&A) 논의와 함께 재계와 정부, 시민단체 사이에서는 경영권 방어와 출자총액제한제도의 관계를 놓고 논란이 제기됐다.

▽경영권이냐, 투자수익이냐=적대적 M&A 가능성이 처음 제기된 것은 이달 4일 영국계로만 알려진 크레스트 시큐러티스가 SK㈜의 지분 8.64%를 사들여 최대주주로 떠오르면서부터.

하지만 이 정도 지분으로는 SK㈜에 대한 경영권을 확보할 수 없어 시장은 수익창출을 위한 단기투자, 또는 경영권이 취약한 기업의 지분을 사들여 인수합병을 포기하는 대가로 높은 가격에 지분을 되파는 ‘그린 메일(Green Mail)’일 것으로 추측했다.

▽숨가쁘게 진행된 ‘적대적 M&A’ 논란=그러나 10일 크레스트가 추가 지분매입으로 12.39%의 지분을 확보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크레스트측은 공시를 통해 수익창출이 목표라고 밝혔지만 출자총액제한에 의한 의결권 제한 때문에 SK㈜가 경영권 방어에 동원할 수 있는 지분을 훌쩍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13일 “외국 동일인(크레스트) 지분이 10%를 넘어섰기 때문에 SK㈜는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분류돼 출자총액제한의 예외가 적용된다”는 유권해석을 내리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의결권이 묶여 있던 7.6%의 계열사 지분을 활용, 경영권 방어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다음날 크레스트의 모회사격인 소버린자산운용이 보도자료를 통해 “장기투자를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면서 SK㈜에 대한 적대적 M&A 논란은 정리 국면에 들어섰다.

하지만 소버린측이 “SK㈜를 기업지배구조의 모델기업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SK㈜ 경영진과 건설적으로 작업하겠다”고 밝혀 지분만큼의 경영권 참여나 기업지배구조 개선요구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게다가 SK㈜에서 시작된 경영권 문제가 SK텔레콤과 관련해 불똥이 튈 조짐도 보이고 있다. 크레스트의 SK㈜ 보유지분이 전기통신사업법상 외국인으로 간주되는 15%에 육박, SK㈜가 갖고 있는 SK텔레콤 지분(20.85%)에 대한 의결권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 SK텔레콤에 대한 지배력을 잃을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지배력 유지를 원하는 SK㈜에 크레스트가 지분을 비싸게 되팔 가능성이 새로 제기된 것이다.


▽재계와 정부의 출자총액제한제도 논란=SK㈜가 적대적 M&A에 노출된 것으로 알려지자 재계는 “출자총액제한 때문에 계열사를 통한 지분 추가매입이 제한돼 국내의 대표적인 기업마저 해외 자본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지 못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현명관(玄明官)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도 “출자총액제한제도가 기업의 행동을 제약하기 때문에 증권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출자총액제한제도는 폐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재벌개혁 방침에 발맞춰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오히려 강화하려던 공정위는 경기침체와 함께 재계의 이 같은 반발에 부닥쳐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13일 SK㈜를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분류해 출자총액제한 예외로 인정한 것도 ‘국부유출’ 비판을 비켜가기 위한 공정위의 ‘고육지책’이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이번에 SK㈜의 경영권 방어에 활용한 예외조항도 2001년 기업규제완화 당시 재계가 경영권 보호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을 공정위가 끝까지 반대하다가 마지못해 넣어줬던 것”이라며 공정위의 단견(短見)을 비판했다.

이와 관련, 재정경제부의 한 관계자는 “SK글로벌 사태가 다른 계열사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데 출자총액제한제도와 상호출자, 채무보증 금지 등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재계가 잊은 것 같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경제상황을 무시하고 개혁속도를 올리려는 공정위나 재벌개혁에 무조건 저항하려는 재계 모두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해 합리적인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원인-해법 놓고 공방치열 ▼

SK㈜의 1대 주주 크레스트가 부각되면서 대기업의 경영권 및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둘러싼 논란이 불붙었다.

재계나 시민단체는 ‘적대적 M&A가 시장 기능에 따른 것으로 이를 인위적으로 제약할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또한 ‘기업의 장기 발전을 위해서는 경영권 안정이 중요하고, 한국의 주요 대기업들이 마구잡이로 외국 기업이나 해외 헤지펀드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도 공유한다.

원칙론에 있어서는 완전히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원인과 해법 부분에 가면 주장이 달라진다.

재계는 “정부의 비현실적인 규제로 인해 국내 기업이 외국 기업의 적대적 M&A에 과다하게 노출되어 있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자유기업원 이형만(李炯晩) 부원장은 “외국 기업에는 없는 출자총액규제와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으로 한국 기업의 발목을 꽁꽁 묶어 놓고 불공정한 경쟁을 하라는 것은 국익을 저버리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글로벌 시장경쟁체제 아래서 한국 기업을 역차별함으로써 국내 기업의 경영권이 외국기업이나 투자가들에게 손쉽고 값싸게 넘어가는 것을 정부가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시민단체는 기업지배구조 불투명 등의 이유로 잠재실력에 비해 실적이 좋지 않은 기업들이 M&A에 노출되는 것이며 이처럼 경영을 잘못한 경영진에 대해 ‘경영권 보호’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金尙祚·한성대 교수) 소장은 “경영권 안정을 꾀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배구조개선을 통해 기업가치를 높임으로써 주주와 채권단의 신뢰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들은 나아가 “재계는 소액주주와 저축자의 희생을 통해 재벌총수의 경영권을 보호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사안과 관련해 사촌형제 사이인 장하성(張夏成)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고려대 교수)과 장하준(張夏準) 케임브리지대 교수도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장하성 교수가 ‘재벌의 경영불투명’ 쪽에 비중을 두는 반면 장하준 교수는 “재벌의 환골탈태를 전제로 정부가 경영권 확보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휴대전화 1등' 에릭슨의 경우 ▼

8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는 이 나라 최대의 기업인 에릭슨의 주주총회가 열렸다. 휴대전화 시장에서 삼성전자나 노키아 등에 고전하고 있지만 기술개발과 모바일시스템 공급 분야에서 지금도 세계 최강인 에릭슨은 스톡홀름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의 40%를 점하고 있다.

이 기업의 주식은 ‘1주=1000표’인 A주식과 ‘1주=1표’인 B주식으로 차등(差等) 구성되어 있다. 스웨덴 최대 재벌인 마커스 월렌버그 가문과 관계사가 소유한 에릭슨 주식은 8%에 불과했으나 이 차등의결권 덕분에 85%라는 확고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사브, ABB, 아스트라 등 스웨덴의 세계적 기업들을 장악한 월렌버그 가문의 스웨덴 경제에 대한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우리와 대비되는 것은 기업을 발전시킨 월렌버그 가문에 대한 스웨덴 사람들의 신뢰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차등 의결권은 스웨덴뿐 아니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국가에서도 존속되고 있다. 안정된 경영권을 보장하고 단기적 배당보다는 장기적 투자를 통해 기업 가치를 확대하기 위한 목적에서이다.

유럽연합(EU)이 최근 들어 가입국들이 ‘1주당 1표’의 의결권을 행사하는 미국식 제도를 권고하고 있지만 잘 먹혀들 것 같지 않다. 자국민의 안정된 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막아야 하고 이를 위해 차등의결권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

스웨덴처럼 인구 900만명인 나라에 상장된 기업이 거대한 해외시장에서 조성된 자본의 M&A에 노출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시각이다.차등의결권은 투자 유치에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스웨덴 투자청 관리들은 말했다. 에릭슨은 작년에 30억달러에 달하는 유럽 역사상 최대의 유상증자에 성공했는데 이 중 반 정도가 외국인투자였다. 안정된 거시경제와 노동생산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 정부와 기업의 투명성 덕분에 스웨덴은 외국인투자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2, 3개 나라 중 하나이다. 에릭슨의 사례는 한국경제에 두 가지 시사점을 준다. 기업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때 그 정부와 국민은 그들의 경영권을 지켜준다는 것과, 글로벌시대라고 해서 모든 나라가 자국의 기업이 외국인투자자 손에 넘어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스톡홀름=김용기기자 y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