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로공단의 기업들을 찾아다니는 국민은행 구로벤처센터 지점의 구재유 심사역은 간혹 공장 정문에 이런 표지판이 내걸린 걸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요즘 공단 내 유망한 중소기업을 놓고 은행들끼리 대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벌어지는 현상. 구씨는 “기업이 은행 출입을 막다니, 격세지감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구로공단뿐만 아니라 인천 남동공단, 경기 안산시 시화공단 등 어느 공단을 가봐도 이처럼 은행들은 서로 기업에 돈을 빌려주지 못해 안달이다.
그러나 같은 공단 한편에서는 구씨와 같은 은행원의 발걸음을 애타게 기다리는 기업도 많다. 자동차 튜너를 만드는 P사는 증권거래소에 상장까지 된 업체지만 은행 문턱이 높다. 이 회사는 재작년 적자를 내면서 은행으로부터 ‘요주의’ 판정을 받고 있다. 그 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끝내고 작년 흑자로 전환했지만 아직 은행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업계 전망이나 판로는 괜찮지만 당장 재무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이유다. 회사측은 “은행이 기업의 회계장부만 들여다보려 하지, 전체적인 기업역량을 평가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연재물 목록▼ |
은행에 돈이 남아돈다는 저금리시대라고 하지만 모두 그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P사처럼 ‘저금리의 소외지대’도 많다. 물론 이 같은 차별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개별기업의 실적과 신용도에 따라 차등화된 금리는 금융시장 기능을 활성화하고 옥석(玉石)을 구분케 해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시스템의 미비로 돈이 꼭 돌아야 할 곳에 돌지 않는 자금의 ‘동맥경화’ 현상도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 담보대출 위주에서 신용대출로, 객관적 신용평가에 의한 ‘시스템 대출’로 바뀌고 있는 건 바람직하다. 문제는 그 ‘시스템의 배관망’이 제대로 완비되지 않아 저금리 효과가 강물처럼 흐르지 않는다는 것.
특히 기업 실적과 신용이 나름대로 검증된 대기업에 비해 중소기업에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진다. 시스템이 바뀌는 과정에서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신세가 돼버린 셈이다.
기업은행 기업고객부 김종완 차장은 “담보 능력은 취약해도 기업의 장래성이 있는 기업들이 새로운 ‘객관적 신용평가’에서 밀려 대출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 대출시스템의 많은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다”고 말했다.
최근 많이 들어서고 있는 아파트형 공장에 대해서도 이를 제대로 평가할 틀이 갖춰져 있지 않아 자금지원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게 은행 관계자들의 말이다. 은행의 대출시스템이 급변하는 기업환경 변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얘기다.
한 시중은행의 지점장은 “요새 기업들을 접하다 보면 과거의 업종 구분이나 사업성에 대한 전망을 갖고는 제대로 평가할 수 없는 기업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면서 “은행이 일률적인 잣대가 아닌 ‘탄력적인’ 기업 평가 및 대출시스템을 갖춰야 효율적인 자금 흐름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