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최고 지도자는 박정희”〓1961년 5월 16일 정권을 잡은 박정희 소장은 같은 달 25일 군사혁명위원회를 열어 기획과 조정을 맡고 있던 부흥부에 재무부의 예산국과 내무부의 통계국을 통합시키기로 결정한다. 이 결정에 따라 2개월 뒤 출범한 경제기획원은 94년 12월까지 ‘주식회사 한국’의 기획조정실 역할을 맡았다.
또 73년 2월 박 대통령은 산림청(현재 농림부 산하)의 소속을 농림부에서 내무부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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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변태적인 조직”이라는 국회의 비판을 무릅쓰며 이를 단행한 이유는 ‘산림 도벌(盜伐)’을 막기 위해서였다. 도벌 근절을 위해서는 경찰력 동원이 필요한데 소속이 같아야 업무협조가 원활할 것으로 판단했던 것.
이 두 가지는 박 대통령이 정책을 추진할 때 시스템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남 전 총리는 이를 성공적인 국가 지도자의 세 번째 자질로 꼽았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지도이념이 확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박 대통령의 지도이념이 ‘자주국방과 경제 건설’이라는 데 대해 당시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는 재원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흔히 ‘경륜’이라고 합니다. 박 대통령에게는 빈곤 탈출이 최우선 순위였습니다. 박 대통령 이후에는 어떤 국가지도자도 이 세 박자를 모두 갖춘 분이 없었습니다.”
▽현대식 신언서판(身言書判)〓중국 당(唐)나라는 4가지 기준에 따라 관리를 선발했다. 오늘날까지 인재감별 기준으로 널리 쓰이는 ‘신언서판’이 그것이다.
남 전 총리는 40년대 후반 2년가량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선생의 비서생활을 하면서 해공 선생에게서 이 말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남 전 총리는 신언서판 가운데 ‘외모(身)’와 ‘글씨(書)’는 지금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남 전 총리가 인재를 감별할 때 가장 중요하게 따진 것은 문제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해서 설명하는 능력이었다.
영어로는 ‘articulation(명료화)’이 가장 가까운 표현이고 신언서판 가운데서는 ‘판단력(判)’과 ‘말솜씨(言)’가 여기에 해당한다.
“첫째 기준에 가장 잘 들어맞는 인물이 김재익(金在益)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었습니다. 외국인들도 그의 설명을 듣고 감탄할 때가 많았습니다. 김용환(金龍煥) 전 재무부 장관도 이런 능력이 뛰어나 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요.”
남 전 총리가 인재를 감별하는 두 번째 기준은 추진력이다. 그의 밑에서 기획원 차관을 지낸 최각규(崔珏圭) 전 경제부총리가 대표적인 케이스. 75년 11월 남 부총리는 방한 중이던 이란 안사리 재무부 장관과 마주앉는다.
두 나라의 경제협력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1차 오일쇼크 여파가 가시지 않았을 때라 한국 쪽이 사정하는 처지였다.
이때 안사리 장관이 남 부총리에게 꺼낸 첫마디는 “최 차관을 데리고 있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최 차관은 치밀한 준비와 집요한 추진력으로 사전협상에서 이란측의 양보를 모두 받아냈던 것.
세 번째 인재감별기준은 ‘인화(人和)’다. 70년대 초반과 중반 재무부 핵심 요직인 이재국장을 6년 가까이 지낸 이용만(李龍萬) 전 재무부 장관을 남 전 총리는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다. 이 전 장관은 원만한 대인관계, 특히 부하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으로 부처를 효율적으로 이끈 것으로 정평이 높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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