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크레스트증권이 SK㈜의 주식을 대거 사들인 사실이 밝혀지자 국내 증시와 재계는 SK그룹 경영권의 향배를 놓고 한동안 혼란에 휩싸였다.
이 같은 혼선에는 정부 부처들이 제각각 다른 해석을 내놓은 점도 한몫을 했다. 공정거래법, 전기통신사업법, 증권거래법, 외국인투자에 관한 법 등이 각각 관련 규정을 두고 있는 데다 일부 규정은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정부조차 종합적으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한국은 고도성장에서 파생된 경제력 집중의 부작용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대기업들을 이중 삼중으로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시장이 개방되면서 이 같은 규제가 외국의 거래자본에 비해 국내 자본을 부당하게 역(逆)차별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 기업 역차별〓국내 대기업은 투자와 인수합병, 금융, 노동 등 기업 활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외국기업에 비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
예컨대 자산 5조원을 넘는 국내 대그룹은 출자총액제한 때문에 인수합병(M&A)에 참여하기 힘든 반면 외국 기업은 마음대로 국내 기업 지분을 사들일 수 있다.
이형만(李炯晩) 자유기업원 부원장은 “국내 M&A 시장은 외국 기업들의 독무대나 다름없는 불공정 시장”이라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적대적 M&A에 맞서 경영권을 방어하기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외국인이 출자총액한도가 꽉 찬 국내 대그룹 계열 A사의 지분을 사들이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A기업 계열사들은 출자총액제한 때문에 외국인 지분이 10%를 넘어서야만 경영권 방어를 위한 지분매집에 나설 수 있다. 외국인 지분이 10%를 넘으면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분류돼 출자총액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비싼 값에 A기업의 지분을 팔고 나가면 A기업 계열사들은 출자총액규제에 다시 묶여 초과지분을 팔아야 한다.
▽대기업에 대한 이중의 과잉 규제〓현재 보험회사는 총자산의 3%를 초과해서 자기 계열사 주식을 가질 수 없다.
여기에 더해 공정거래법은 의결권까지 제한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그룹 안에서 B보험사와 C, D, E사가 F사의 주식을 9%씩 갖고 있으면 B보험사는 3%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계열사들의 지분합계가 30%를 넘으면 보험사는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법에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30%까지는 허용된 의결권을 전면 제한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신종익(申鍾益) 전국경제인연합회 규제조사본부장은 “위험 분산을 위해 출자를 제한하는 나라는 많지만 지분 소유와 의결권을 함께 규제하는 나라는 드물다”며 “금융보험사는 우량기업에 투자하지 말라는 식”이라고 비판했다.
전경련은 대규모 기업집단은 은행법 등 25개 개별 법에 의해 36가지의 복합 규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객관성도 일관성도 없는 잣대〓공정거래법은 자산이 5조원을 넘으면 출자총액을 제한받고 상호출자와 채무보증이 금지된다. 또 자산이 2조원을 넘으면 상호출자와 채무보증이 금지된다.
조동근(趙東根)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의 대기업을 모두 합쳐도 세계적인 1개 다국적 기업의 덩치에도 미치지 못 한다”며 “이런데도 한국기업을 덩치 순으로 잘라 출자를 규제하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규제의 기준이 왜 자산인지, 금액기준이 왜 5조원과 2조원인지 객관적인 근거는 뭐냐”며 정부측을 비판했다.
공정거래법의 지주회사 관련 조항을 보자. 한 페이지에만 ‘…요건에 해당한다고 공정위가 인정하는 경우’ ‘공정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때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공정위는 …할 수 있다’ 등의 표현이 잇달아 나온다.
이처럼 정부가 자의적으로 판단할 여지가 많기 때문에 공정위 내부에서도 “공정거래법은 걸면 걸린다는 뜻에서 ‘걸리버 법’이라고 부른다”는 말까지 나온다.
특히 공정위는 삼성그룹의 부채비율이 100% 미만으로 낮아져 출자총액규제에서 벗어나려 하자 예외조항 폐지를 검토하는 등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법을 바꾸고 있다.
이 때문에 이달 7일 공정위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출자총액 강화 검토 방침을 보고했을 때는 김진표(金振杓)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권오규(權五奎) 대통령정책수석비서관이 나서 정책의 일관성을 이유로 반대했을 정도.
한 대기업 구조조정본부 관계자는 “비록 사회주의에서도 정책의 일관성만 있다면 기업은 적응할 수 있다”면서 “일관성 없는 정책이 규제 자체보다 기업을 더 위축시킨다”고 말했다.
이형만 부원장은 “정부가 직접 사전규제를 하지 않더라도 공시제도와 증권집단소송제 등을 통해 시장이 충분히 기업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대한 주요 규제 현황 | ||||||
구분 | 1996년 | 1998년 | 1999년 | 2001년 | 2002년 | 개정 방향 |
대규모기업집단 지정대상 | 30대 그룹 (자산 기준) | 30대 그룹 | 30대 그룹 | 30대 그룹 | 자산 2조원 이상(43개 기업집단) | 자산2조원 이상 |
출자총액제한 | 30대 그룹, 순자산의 25% 초과 출자 금지 | 출자제한 폐지 | 출자제한 폐지 유지 | 자산 5조원 이상, 순자산의 25% 초과 출자금지 | 25% 규정 유지, 재무구조 우량기업, 외국인투자기업 등 일부예외 | 25%규정유지, 예외 조항 없애 규제강화. |
금융보험사의 지분보유 제한 | 보험, 총자산의 3% 이내 등 계열주식 소유제한 | 소유제한 유지 | ‘보험 3%’를 2%로 소유제한 강화(2000년) | 2%를 3%로 소유제한 완화(증권 투신사 8%, 10%) | 3% 소유제한 유지 | 금융계열사 계열분리 청구, 지분 소유제한 강화 등 검토 |
부당내부거래 조사의 계좌추적권 | 없음 | 없음 | 공정위, 계좌추적권보유(2년 시한) | 보유 시한 연장(3년간) | 계좌추적권 보유 중 | 영구 보유 |
대규모 내부거래의 공시 의무 | 없음 | 없음 | 10대 그룹 | 30대 그룹 | 자산 2조원 이상 | 자산 2조원 이상 |
지주회사 | 금지 | 금지 | 제한적 허용 | 제한적 허용 | 제한적 허용 | 지주회사 전환 때 계열사 독립 유도, 자회사간 출자규제 신설, 유예기간 연장 |
자료:재정경제부, 공정거래위원회 |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구호에 그친 규제완화▼
외환위기 직후 출범한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각종 규제가 국가경쟁력 강화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극복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에 따라 규제를 크게 완화하겠다고 선언했다. 1998년 4월 7일에는 규제개혁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자유화 수준과 국가경쟁력을 세계 10위권으로 끌어올린다는 청사진도 내놓았다. 5년이 지난 지금 이런 청사진은 얼마나 실현됐을까.
DJ정부 초반 규개위를 중심으로 규제 완화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리면서 양적으로는 크게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98년 8월 말 현재 1만716건에 이르던 규제건수는 99년 말 7512건으로 줄어들고 2000년 말에는 7042건까지 감소했다.
양적으로는 규제가 이처럼 크게 줄었는데도 질적인 면에서는 평가가 엇갈렸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00년 9월 한 달 동안 346개 기업을 대상으로 DJ정부의 규제완화 성과를 조사한 결과 긍정적인 답변이 많았지만 부정적인 답변 또한 적지 않았다. △많은 성과가 있다 2.60% △다소 성과가 있다 60.12% △별로 없다 34.97% △전혀 없다 0.58% △오히려 악화됐다 1.73% 등으로 나타난 것.
더구나 DJ정부 후반에는 규제건수마저 상승세로 돌아섰다. 2001년 한 해 동안 140건이 증가했고 2002년 1월∼2003년 4월에는 493건이 추가로 늘어났다.
경제 관련 20개 부처(위원회 및 청 포함)의 규제건수 현황을 보면 2001년 이후 지금까지 규제건수가 줄어든 곳은 특허청(4건)과 철도청(1건)뿐이다.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통계청은 변동이 없었다.
규제건수가 가장 많이 늘어난 부처는 노동부(90건)였고 이어 △공정거래위원회 79건 △해양수산부 74건 △건설교통부 71건 △농림부 63건 △산업자원부 62건 등의 순이었다.
98년 8월과 비교할 때는 공정거래위원회(86건)와 노동부(8건)만 규제건수가 증가했다.
이처럼 DJ 정부 후반 규제가 다시 늘어나면서 한국의 경제자유도에 대한 국제평가도 대폭 추락했다.
미국 헤리티지재단과 월스트리트저널이 매년 발표하는 경제자유지수 국가순위를 보면 한국은 2000년 29위에서 2001년 38위로 미끄러졌고 지난해에는 몰타 나미비아 등과 함께 52위로 나타났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
▼총수지배-구조本은 惡인가▼
정부와 시민단체들로부터 자주 도마에 오르는 한국 대기업 ‘지배 구조’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다. 주력 업종과 관계없는 계열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다는 점과 소수 지분을 가진 총수가 기업을 사실상 지배한다는 점이다.
대기업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는 데는 동의한다. 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한꺼번에 구조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항변한다. 특히 한국의 대기업들이 40∼50년의 짧은 기간에 압축 성장을 하면서 불가피하게 형성된 측면을 무시할 수 없고 정부 정책도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대 국제지역원 문휘창(文輝昌) 교수는 “대기업들은 자본시장과 관련 산업이 발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압축 성장을 하는 동안 많은 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면서 “현재 ‘비(非)관련’으로 지목되는 계열사들은 그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 많다”고 말했다. LG가 화학제품을 만들면서 이 제품들을 담을 박스 회사가 없어 직접 박스 공장을 만들었다는 것은 재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대기업들은 ‘총수 지배’와 구조조정본부에 대한 비판도 일방적이라고 반박한다.
한국의 대기업은 총수가 구조조정본부로 대변되는 ‘헤드쿼터’를 지배하고, 이 헤드쿼터가 계열사의 전문경영인들을 통제하는 형태가 많다.
재계 관계자들은 소액주주들이 단기 차익을 위해 주식 투자를 하고, 정치권과 결탁한 은행들이 기업 경영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계열사들의 경영과 성장을 감시, 육성한 조직이 바로 구조본, 또는 과
거 비서실이었다고 항변한다.
총수가 소수 지분을 갖게 된 데는 정부 정책도 한몫을 했다. 정부는 대기업 중심 경제성장이 일정 궤도에 오르자 ‘경제력 집중’을 문제 삼으면서 기업 공개를 ‘강요’하고 대기업들의 지분 소유 분산을 적극 유도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소수 지분을 가진 총수가 기업을 지배하는 것을 문제 삼는 데 대한 반발이 재계에서는 적지 않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左承喜) 원장은 “경쟁환경과 시장상황의 변화에 따라 기업들도 지배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면서 “다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이 스스로 변해야지 정부가 일률적으로 강제할 사안은 아니다”고 말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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