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업계 “좋은 시절은 끝났다”=현재 한국 정유업체의 ‘메이저’는 SK㈜ LG칼텍스정유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인천정유 등 5개사.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정유업계는 정부의 허가제 우산 속에서 연평균 18%의 고성장을 구가했다. 9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후 개방화를 서두르던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석유류 가격 및 수출입을 자유화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외환위기로 소비가 침체된 데다 해외 덤핑시장에서 사들인 석유제품을 싸게 푸는 석유수입사의 공세로 정유업체들의 경영상태는 급속히 악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99년부터 인수합병(M&A)이 가속화돼 오일뱅크의 지분 50%는 아랍에미리트(UAE)의 국영투자회사가 사들였고 쌍용정유의 지분과 경영권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사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에 매각됐다.
결국 정유업계는 2000년에 2194억원, 2001년에는 2377억원의 연속 적자를 냈다. 지난해 업계 전체가 7654억원의 이익을 냈지만 대부분은 환차익에 의한 것.
▽새로운 도전들=수입자유화 이후 해외 덤핑시장에서 싼 값에 석유제품을 사들여오는 수입업체들의 공세는 매서웠다. 97년 1개에 불과했던 수입업체는 2000년 21개, 2002년에는 41개로 늘었고 지난해 하반기에 시장점유율을 10%까지 높였다. 이러다보니 국내 정유업체들은 남아도는 생산량을 국제 현물시장에 울며 겨자먹기로 내다팔고 있다.
LNG LPG 등 가스제품의 소비가 크게 늘면서 벙커C유, 중유 등 중질유(重質油)의 소비를 잠식하고 있는 것도 문제. 남아도는 중질유를 다시 정제해 휘발유, 등유 같은 경질유로 만드는 중질유 분해시설을 갖추는 데 업계 전체가 7000억∼1조원을 투자해야 한다.
최근 대기환경보전법이 개정돼 2006년 1월까지 ‘유로4’ 기준에 맞춰 경유의 황 함유량을 대폭 낮춰야 하는 것도 큰 부담이다. 추가 설비투자만 1조5000억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대한석유협회 안병원(安秉遠) 회장은 “정유업계 전체의 영업이익이 급속히 줄고 있어 석유 무기화에 대비해 국가별로 정제시설을 갖춘다는 ‘소비지 정제주의’를 지켜가려면 정부 차원에서 특단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석유세금이 국방비를 초과=지난해 한국의 평균 휘발유값은 L당 1267원으로 OECD 회원국 평균 905원보다 훨씬 높았다. 이유는 높은 세금 때문이다.
휘발유값의 70%는 부가가치세 특별소비세 교통세 교육세 주행세 등 세금이며 관세와 정부부과금을 합하면 85%가 국고로 들어간다. 정부가 지난해 석유와 관련해 거둬들인 세금은 17조원으로 국세 중 석유류 세금이 차지한 비중은 16.8%. 국방예산(16조원)을 넘는다.
하지만 정부는 세수감소를 우려해 관세와 각종 세금의 인하를 주저하고 있다. 또 각종 원재료에 1% 미만의 관세를 매기는 것과 달리 한국은 원유에 유독 5%의 높은 관세율을 적용하고 있다.
SK㈜의 황두열(黃斗烈) 부회장은 “원유수입에 관세를 매기지 않는 대만이나 중국, 1%인 일본에 비해 한국의 정유업체는 대단히 불리하다”고 주장했다. 휘발유 등 완제품의 수입관세는 7%.
▽어두운 미래=올 들어 정유업계 전체 매출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1위업체 SK㈜가 SK글로벌 사태와 맞물려 어려움을 겪고 있다. SK㈜는 국제 메이저나 산유국의 지분이 큰 다른 정유업체와 달리 민간 정유업체로는 유일하게 해외 유전개발 노력을 기울여왔다.
해외 에너지개발은 성공률이 1%에 불과한 ‘모험산업’이다. 한국의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꼭 필요한 투자지만 기업의 이익에는 도움이 안 된다. 최근 SK㈜의 1대 주주로 올라선 해외자본 크레스트증권이라면 이런 ‘무모한’ 투자에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정유업체들이 경쟁력을 잃으면 장기적으로 소비자들은 더 비싼 석유를 쓸 수밖에 없어진다. 이 때문에 정부가 일관된 에너지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상곤(李相곤) 원장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제시한 10대 국정과제에서 에너지 관련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면서 “석유산업의 국가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정부는 중장기적인 ‘에너지 안보체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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