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서 부행장들의 ‘생사여탈권’을 꽉 틀어쥔 김 행장은 일상 업무를 부행장들에게 맡기고 강연회 세미나 등을 찾아다닌다. 그러면서 부행장 인사에만 골몰한다. 13명 부행장 진용의 변화를 통해 경영전략을 펼쳐가는 것.
“제겐 이 열세자리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적정 범위(span of control)입니다. 13명 고르고 바꾸는 것만으로도 벅차요. 인사 대상 범위가 넓어지면 한 자리당 투입되는 관찰 평가량은 그만큼 적어지지 않겠습니까.”
사실 김 행장 역시 혼자서 모든 파트 업무를 관장하려 했던 때가 있었다. “(30대 초중반의 증권사 임원 시절에는) 사내 거의 모든 인사와 결정에 관여했지요. 매일 밤 서류와 씨름했어요. 그러니까 아래 간부들이 일을 안 하더군요. 골치 아프고 책임이 따르는 결정은 다 위로 미루고요.”
물론 부행장 인사에 관한 한 김 행장은 ‘독재’ 소리를 들을 만큼 전권을 행사한다. 정관계 노조 언론 등 누가 뭐라 해도 끄떡 않는다. 판단의 잣대는 실적과 시장의 평가. 매주 열리는 간부회의 때도 면밀히 관찰한다.
“일을 적극적으로 하면 회의 때 계속 새로운 걸 들고 오지요. 회의 내내 꿀 먹은 듯 있는 사람은 겸손한 게 아니라 일을 안 하고 공부를 게을리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커요.”
사적(私的) 인연은 맺을수록 능력 위주의 인사를 하기 어렵다는 게 지론. 행장 부인을 정점으로 한 간부 부인들의 친목 모임도 금지시켰다. 취임 5개월여 후인 1999년 2월에는 사내 게시판에 “인사 청탁을 하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공개 경고장을 띄웠다.
“인사철이 되니까 심지어 대리급 인사에까지 정치권 등 외부에서 청탁이 들어오더군요. 해당자를 불러 ‘내 성격 잘 알 텐데 왜 외부 인연을 동원하느냐’고 물어봤지요. ‘가만있으려니 너무 불안해서 관성처럼 인사운동을 하게 됐다’고 그러더군요.”
이른바 ‘코드’가 맞는지 여부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금융업계는 최고경영자(CEO)가 분명한 방향을 정해주고 적절한 자극을 주면 다 알아서 달립니다. 따라오는 속도는 코드가 아니라 능력에 따라 결정되지요.”
물론 돌이켜보면 사람을 잘못 판단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특히 증권사 시절 작은 사고(부도덕한 금융사고)를 낸 부하직원을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며 용서하곤 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더 큰 사고로 회사에 큰 손해를 끼쳤다. 그 후론 도덕성에 작은 흠집이라도 낸 사람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 걸 철칙으로 삼았다.
또 40대 초반까지는 한번 ‘일을 망친’ 사람은 나중에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객관적으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현재 능력이 아니라 예전 실수만 보이는 거예요.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매일 수없이 ‘잊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외쳤어요. 그렇게 몇 년을 하니까 비로소 현재와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을 분리시킬 수 있게 되더라고요.”
30대 초반에 임원이 돼 수많은 인재를 발탁해 온 김 행장.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발탁됐을까. 1982년 그를 한신증권 상무로 스카우트해 중용(重用)한 김재철(金在哲) 한국무역협회장에게 물어봤다.
“개인적 인연은 없고 당시 여러 간부 요원을 스카우트했어요. 그중에서 김정태는 유달리 머리가 빠르고 판단력이 정확하더군요. 일도 깨끗이 해내고요. 특히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고 정직했어요. 뭘 맡겨도 될 것 같은 신뢰가 생길 수밖에요.”
그렇다면 김 행장이 생각하는 자신이 발탁된 배경은 무엇일까.
“글쎄…. 그냥 솔직하게 처신한 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윗사람에게 모르는 건 모른다고 얘기하고, 꼼수는 안 부렸어요.”
그는 결국은 신뢰가 사람을 키워주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윗사람이 나를 믿고 인정해주면 마음속에서 더 어려워하고 충성하게 되지요. 어떤 보상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나에 대한 그 고마운 믿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중국 고대의 가르침과 21세기형 CEO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김 행장의 좌우명이 일치하는 건 우연일까.
이기홍기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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