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非常]<7>지방의 소비와 유통

  • 입력 2003년 6월 3일 17시 38분


코멘트
인근에 대형 할인매장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진 충북 청주시 서문시장.-청주=장기우기자
인근에 대형 할인매장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진 충북 청주시 서문시장.-청주=장기우기자
“여기저기 빈 점포들 좀 보세유. 막막하고 대책이 없구먼유.”

지난달 31일 오후 충북 청주시 서문시장엔 썰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가 빠진 듯 군데군데 빈 가게는 쇠락한 시장 상황을 말없이 보여줬다. 이근우(李根雨) 상가번영회장은 “대형 할인점들의 틈바구니에서 버티기도 힘겨운데 경기마저 꽁꽁 얼어붙었다”며 “입에 풀칠도 못할 판”이라고 말했다.

▼연재물 목록▼

- <6>벼랑에 선 노사관계
- <5>실업의 두 얼굴
- <4>투자 안하는 경제
- <3>벤처 희망은 없나
- <2>고비 맞은 중소기업
- <1>위기의 수출산업

지방 영세상인들의 고통이 나날이 깊어지고 있다. 할인점으로 대표되는 신(新)유통의 공세와 설상가상으로 소비경기마저 급락하면서 “장사 못하겠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이런 양상은 지방일수록, 전통적인 유통업태일수록 더욱 심하다.

▽삼중고(三重苦)에 신음하는 영세상인들=상인들은 할인점의 충격이 광역시 등 대도시보다 인구 10만, 20만명 단위의 중소도시에서 훨씬 크다고 입을 모았다.

첫째, “서울 상인들은 규모가 그나마 크고 도매기능도 일부 있어서 어느 정도 대응력이 있다. 반면 10만명 정도의 소도시에서는 할인점 하나가 상권을 싹쓸이하게 된다.”(김창호·金昶鎬 남서울대학 국제유통학부장)

둘째, 지방일수록 할인점을 열기 쉽다. 상대적으로 땅값이 싸 1층 평면공간에 대형매장을 지을 수 있다. 또 주차여건은 할인점의 생명인데 평지에 주차장을 마련할 수 있다.

셋째, “할인점은 문화, 쇼핑공간이 부족한 지방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쇼핑 경험을 제공하면서 손님을 끌고 있다.”(안승호·安勝浩 충북대 국제경영정보시스템학부 교수)

이 같은 요인 때문에 상당수 지방에서 할인점이 포화상태가 돼 할인점간 치열한 가격경쟁까지 나타나고 있다. 영세상인으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 변화이다.

할인점뿐 아니다. 홈쇼핑 등 무점포영업, 체인형 편의점과 기업형 슈퍼마켓 등의 지방 진출도 상인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임실근(林實根)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전무는 “소형 기업형 유통망이 동네 상인에 미치는 영향은 할인점보다 훨씬 뚜렷하고 심각하다”며 “골목을 사이에 두고 육탄전이 벌어지는 꼴”이라고 설명했다.

이 와중에 불어 닥친 불경기는 영세상인에게 직격탄을 날리고 있는 꼴이다. 임 전무는 “특히 부산 대전 전주 진주 등 수출업종이 적은 지역에서는 체감경기 하락이 훨씬 크다”고 말했다.

각종 통계에서도 실태가 드러난다. 산업자원부가 최근 3년간 주위에 대형 할인점이 생긴 전국 2만여개 중소 소매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지방상권의 붕괴가 확인됐다. 10명 중 9명의 중소상인이 대형 유통업체 때문에 판매액이 급감했다고 응답했고 평균 감소율은 41.8%나 됐다. 지방일수록 이 비율은 커졌다.

또 한국은행이 최근 전국 2500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소비자동향조사에서는 향후 경기전망 소비자동향지수(CSI)와 소비지출계획 모두에서 지방도시(각각 86, 102)가 서울(각각 92, 104)보다 훨씬 낮았다.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경기체감지표의 위축이 심한 것이다.

▽갈등을 해소하려면=여론이 나빠지자 지방자치단체들 사이에 대형 할인점 진출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충북도청은 3월 ‘도정(道政) 조정위원회’를 열고 산하 11개 시군 지방자치단체에 ‘할인점은 인구 15만명당 1개 점포가 적정하다’는 공문을 발송했다. 할인점 허가를 자제해달라는 뜻이다. 도청 관계자는 “할인점의 영향으로 재래상권이 급속히 위축됐고 지역 소득이 역외(域外)로 유출된다는 우려가 많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강원 춘천, 강릉, 원주 등에서도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땅값이 싸 할인점들이 주로 생기는 준(準)공업지역에 일정 규모 이상의 소매점이 들어설 수 없도록 조례를 개정했고, 교통영향평가 등 행정규제도 강화하고 있다. 대전 역시 4월 각 할인점들에 현지 법인화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감추고 늦추는 방법이다. 사실 할인점, 홈쇼핑 등 무점포영업, 편의점, 기업형 슈퍼마켓 등 ‘신유통’의 발달은 거부하기 힘든 큰 흐름이다.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많다. 1996년 유통시장 개방으로 촉발된 신유통의 성장이 유통비용을 절감할 뿐 아니라 물가를 안정시키고 국가경쟁력 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는 데 이론을 제기하는 이는 별로 없다.

하지만 이제는 중소상인들 육성에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시스템 변화에 따른 고통이 예상보다 너무 큰 것이다. 최근 정부가 중소유통업의 혁신을 위한 15대 핵심추진 과제를 선정하고 앞으로 4년간 1조1890억원을 투입키로 하는 등 대책 마련에 들어간 것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했기 때문.

유통 관련 컨설팅업체 ‘FC홀딩스’의 최장호(崔章浩) 대표는 “지역경제 안정과 도시의 활력을 찾으려면 중소상인 공존을 위한 획기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변명식(邊命植) 장안대 유통경영학과 교수도 이런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미국처럼 대형할인점이 매우 잘 발달된 나라에서도 틈새시장을 개척 확보한 자영상인들이 많다”며 “신유통과 공존하기 위한 영세상인 스스로의 혁신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

박용기자 parky@donga.com

청주=장기우기자 straw825@donga.com

▼리모델링 '횡성시장' "매출 40% 늘었어요"▼

리모델링으로 환하게 변한 강원 횡성군 횡성시장 내부.

‘재래시장에 미래가 없다고? 우리를 보라.’

강원 횡성군의 횡성시장은 1981년 횡성읍 중심부 2200평의 부지에 연건평 1000평 규모로 건설됐다.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22년 동안 정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 낡고 평범한 시골장에 불과했다.

상인들 또한 시장여건 변화 속에도 ‘우리는 재래시장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안주해 왔다. 그러나 인근 원주시에 대형 유통업체들이 잇따라 생겨나면서 손님이 줄어들고 상권이 급속히 위축되자 겨우 눈을 뜨게 됐다.

이 시장의 현대화 사업은 지난해 6월 초 국비 4억4400만원, 군비 7억8600만원, 자부담 2억5000만원 등 14억8000만원을 들여 착공, 161개 점포를 현대적 인테리어로 바꿔 올 2월 완공했다.

사업이 처음부터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점포 60%가 임대 상인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공사기간에 물건이 잘 팔리지 않자 반발이 컸다. 상가 소유주들도 사업비 부담 때문에 소극적이었다.

이때 횡성시장조합의 장태종(張泰鍾·49) 조합장이 자신의 점포와 인근 4개 점포의 매장을 현대식으로 꾸미며 사업을 선도했다. 매장이 쾌적해졌고 더불어 손님이 늘자 상인들의 동참이 늘어났다. 반면 반발 움직임도 더 구체화됐다. 장 조합장은 궁리 끝에 전체 점포를 10개 권역으로 나눠 권역별로 2∼3명씩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뒤 소규모 단위로 사업을 추진했다.

‘상권 회복을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차츰 확산되면서 리모델링 사업은 서서히 활기를 보였다. 첫 삽을 뜬 지 8개월 만인 올 2월 마침내 낡고 침침했던 시장 모습이 환하게 밝아지는 등 현대적 감각의 쇼핑센터로 탈바꿈했다. 분위기가 바뀐 덕분에 이제는 매출이 30∼40% 늘고 있다는 것.

성공사례가 알려지자 지난해에 전국의 35개 시장, 올해도 벌써 15개 시장 관계자와 공무원들이 찾아와 시찰하는 등 재래시장 개혁의 모범사례가 되고 있다.

춘천=최창순기자 cschoi@donga.com

▼日, 중소상인 경쟁력 강화 대대적 지원▼

한국보다 앞서 백화점 할인점 등 기업형 유통망과 중소상인의 갈등을 겪은 일본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있을까.

일본 정부는 1990년대까지 대형 유통업체의 성장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가업을 잇는 상인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 1937년 백화점법을 만들었고 슈퍼마켓, 체인점, 양판점(量販店) 등이 활성화된 1970년대에는 대규모소매점포법(대점법)을 만들었다. 대점법은 도심에 300평 이상의 점포를 내려면 지역 중소상인의 허가를 받도록 했고 영업일수, 매장면적, 폐점시간 등도 제한했다.

그러나 대점법이 미국과 무역분쟁의 빌미가 되자 일본 정부는 2000년 ‘신3법’(대점입지법, 중심시가지활성화법, 개정도시계획법)을 마련했다. 규제를 완화하는 대신 경쟁력 있는 중소상인을 집중 육성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

대점입지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는 교통혼잡, 배기가스, 소음 등 환경기준을 통해 대형 유통업체를 규제하고 있다. 대점입지법 시행 이후 지난해 9월까지 대형 유통업체 750여곳이 생기는 등 기업형 유통망이 활성화됐다.

중소상인에게는 상가 현대화, 경영자문, 물류시스템 개선사업 등을 지원해 경쟁력을 키운다. 재래상인들은 상인조합을 중심으로 공동 마일리지, 선불카드, POS시스템, 공동 홈페이지 등을 운영한다. 나아가 상권 활성화를 위해 스스로 할인점이나 백화점을 유치하기도 한다. 일본 유통과학대학 최상철(崔相鐵) 교수는 “경쟁력 있는 중소상인을 육성해 기업형 유통망과 하나의 상권을 이뤄 공생(共生)하도록 만드는 정책”이라고 말했다.

박용기자 parky@donga.com

일본의 기업형 유통망 관련 규제
규제특징
1937년 백화점법 시행백화점 출점 규제
1947년 백화점법 폐지독점규제법 제정에 따라 폐지
1956년 백화점법 부활1500m²(일부도시 3000m²) 이상 백화점 규제
1974년 대점법 시행1500m²(일부도시 3000m²) 이상 소매업까지 규제
2000년 대점입지법 시행1000m² 이상 점포 환경규제

▼특별취재팀▼

▽팀장=허승호 경제부 차장

▽경제부=신연수 임규진 홍찬선 김광현 김태한 황재성 박중현 홍석민 신치영 이헌진 이나연기자

▽사회1부=정용균 강정훈 조용휘 정승호 지명훈기자

▽사회2부=차준호 남경현 황금천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