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를 하나 소개할까요. 늑대가 나타났다고 늘 거짓말을 했던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다들 아시지요. 그런데 이 소년이 나중에 저승에 갔습니다. 염라대왕이 왜 거짓말을 밥 먹듯 했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소년은 ‘너무 심심해서 죽겠더라고요. 이해해 주세요’라며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게다가 ‘내 친구 ○○○는 나보다 훨씬 더 거짓말을 많이 했는데도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요’라고 남의 뒷다리 잡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어떤 유형의 직장인을 가장 싫어하느냐”는 질문에 이 회장은 ‘자작(自作)으로 보이는 우화’를 예로 들면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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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 속에는 인재가 되려는 사람이 금기시해야 할 네 가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바로 ‘거짓말, 변명,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억지, 뒷다리 잡기’입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인물 유형이지요. 직장인으로 성공하려면 이 같은 네 가지 금기 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이 회장은 사람의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보려 하고, 그것을 키워주는 타입의 리더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한번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좌절을 딛고 성공했을 때 이 회장은 전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아무리 능력 있는 최고경영자(CEO)라 해도 모든 사업에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런데 실패했다고 무조건 버리면 인재를 잃는 것입니다. 다른 사업부로 옮기면 더 큰 성공으로 지난번의 실패를 만회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그래서 저는 ‘실패는 자산’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과감하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실수나 실패는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이 될 수 있으므로 격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동일한 실패의 반복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한 간부에 대해 이 회장이 쏟는 각별한 애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기태(李基泰) 삼성전자 사장의 중용이다. 93년 6월 이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간부들을 불러 신경영을 선언하던 당시, 이 사장은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이사였다. 엄청난 위기라며 “일류만이 살아남는다”고 강조하는 이 회장의 말을 듣던 이 이사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당시 불량품을 양산해 내던 단말기 기술 수준을 뼈저리게 자책했던 것.
그러나 94년까지도 불량품은 계속 쏟아졌다. 하루아침에 일류로 도약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좌절은 깊어갔다. 그러나 이 회장은 다시 한번 도전해보라고 격려했다. 격려에 힘을 얻은 삼성전자 무선전화팀은 그동안 만든 단말기를 모두 모아 불태워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였다.
그 후 ‘애니콜 신화’는 시작됐고 그는 상무이사(96년), 전무이사(98년), 부사장(99년)을 거쳐 2001년에 삼성전자 정보통신 총괄 대표이사 사장이 됐다. 거의 1년에 한 단계씩을 뛰어오르는, 삼성에서도 드문 고속 승진을 거듭한 것.
이처럼 이 회장의 인사철학은 ‘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用人不疑)’로 알려져 있다. 의심나면 쓰지 말고, 일단 쓰기로 마음먹었으면 결코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이 회장이 쓰고 싶어 하는, 갈망하는 인재는 어떤 유형일까.
“바로 천재입니다. 외부에서는 신경영이 질(質)위주 경영이었다면, 제2 신경영은 무엇이냐고 궁금해들 합니다.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나라를 위한 ‘천재 키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재를 그토록 강조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몇 년 전부터 5년, 10년 후 뭘 먹고 살지를 고민해 왔어요. ‘바로 이거다’ 하는 사업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환경이나 기술이 너무도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미래의 보장된 사업을 지금 찾아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제였어요.”
이 회장은 며칠씩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우리의 활로를 고민했다고 한다.
“주변 상황을 돌아봤지요. 지금 일본이 불경기라고 해서 우리가 일본을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일본의 기술력은 아직도 대단합니다. 일본은 정녕 다시 봐야 하는 ‘잠자는 사자’입니다. 중국은 코스트가 우리나라의 10분의 1 수준으로 생산력이 세계 최대지요. 게다가 시장매력 때문에 외국 자본이 투자를 많이 합니다. 우리보다 대학수가 절대적으로 많고 세계 100위권에 드는 대학도 많아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대학과 인재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공계 비율이 우리는 40% 수준인데, 중국은 60%를 넘어섰습니다. 지도층의 대부분이 이공계 출신이고 연구개발(R&D), 소프트웨어, 연구소 수준까지 앞서고 있어요.”
이 회장은 중국 정부 및 국무원의 이공계 출신 지도부 18명의 인적사항까지 근거로 제시했다.
“이런 추세라면 반도체 액정표시장치(LCD) 무선통신 기술마저 중국에 처질 수가 있어요. 또 중국의 경쟁력은 홍콩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세계 기업들의 아시아 본부가 홍콩에 940개, 싱가포르 200개, 상하이 40개인데 한국에는 단 1개뿐입니다. 기업은 기초적인 사업 인프라가 잘 깔려 있는 곳으로 몰리는 게 당연한데 우리는 이런 기초적인 것조차 안돼 있어요. 파이낸싱, 세금, 영어인력 등 기본적인 것을 어떻게 갖춰야할지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본 여건이 안 된 상태에서 아무리 외국기업에 들어오라고 손짓해도 안 옵니다. 지금 우리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위기상황입니다. 기업 정치 행정 각계의 리더들이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날 겁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뛰어난 인재를 육성해야겠다는 겁니다. 삼성만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인재를 키우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결국 천재, 우수 인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국가나 기업이 경쟁에서 이기게 된다는 게 나의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21세기는 경쟁이 극한 수준으로 치달으면서 소수의 창조적 인재가 승패를 좌우하게 되는 거죠. 과거에는 10만명, 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앞으로는 천재 한 사람이 10만명, 20만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될 겁니다. 총칼이 아닌 사람의 머리로 싸우는 두뇌전쟁의 시대에는 결국 뛰어난 인재, 창조적 인재가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됩니다. 20세기에는 컨베이어 벨트가 제품을 만들었으나 21세기에는 천재급 인력 1명이 제조공정 전체를 대신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반도체 라인 1개를 만들려면 30억달러 정도가 들어가는데 누군가 회로선폭 반만 줄이면 생산성이 높아져 30억달러에 버금가는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천재들을 키워 5년, 10년 후 미래산업에서 선진국과 경쟁해 이기는 방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디자인 천재, R&D 천재, 설계 천재 등 분야별로 천재급 두뇌를 많이 확보하고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시장이 어떻게 변하든 두려울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 회장이 말하는 천재는 구체적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 이 회장은 삼성의 누구를 천재급 인재라고 여기고 있을까.이기홍기자 sechepa@donga.com
▼이건희 회장은 ▼
고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창업자의 3남으로 1966년 동양방송에 입사했으며 중앙일보 동양방송 이사 등을 거쳐 78년부터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그룹 경영에 본격 참여했다. 87년 그룹 회장에 취임했고 93년 신(新)경영을 주도해 질 위주의 경영과 인재 등용 정책을 펴 삼성그룹을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으로 도약시켰다. 경남 의령군 출생. 61세. 서울대사대부고, 일본 와세다대,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 서울대 명예경영학 박사. 부인 홍라희(洪羅喜) 삼성미술관 관장과의 사이에 1남 3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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