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노사관계 모델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정부는 네덜란드 모델을 내비쳤고, 경제계는 원칙적으로 시장경쟁체제에 의한 해결을 주장하고 있다.
영미식은 고용 및 해고가 손쉬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바탕으로 노사자율에 의한 해결을 원칙으로 하되 불법행위에 대해선 정부가 나선다는 방식. 노조의 경영참여는 허락되지 않는다.
반면 유럽식은 노조가 상대적으로 폭넓은 경영 참여를 하며, 정부가 사회복지 차원에서 적극적인 당사자 또는 중재자 역할을 한다. 네덜란드식은 그 중간 지점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제계, 노조 경영 참가 반대=경영자총협회 이동응(李東應) 정책본부장은 “근로자들의 참여제도는 생산성 향상 서클에서부터 경영 참여까지 다양한 단계가 있다”면서 “노조의 경영 참여제도는 유럽에서도 독일 등 일부 선진국의 극단적인 형태이며 이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독일에서도 이사회가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로 이원화돼 있으며 감독이사회에 채권자(은행)나 노조 등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사가 참가한다. 경영의 집행은 경영이사회가 맡는다.
그는 “경영상의 문제가 근로자들의 근로여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때 노조가 이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어도 경영 결정 자체를 노사 합의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또한 “청와대의 제한적 경영참여가 어느 수준인지는 모르겠으나 ‘노조의 경영참가’를 강조함으로써 또다시 노조의 기대만 한껏 부풀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자유기업원 김정호(金正浩) 원장은 “노사관계도 결국은 시장경쟁과정의 일부”라면서 “이를 정부가 강제하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노사관계 모델은 기업들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별로 선택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노동 전문가들도 ‘시기상조’=여러 노동전문가들은 이정우(李廷雨) 대통령정책실장의 ‘네덜란드식 노사관계 모델’ 발언에 대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도입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내 상황이 네덜란드와는 너무나 달라 조급하게 적용했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만 낼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주희(李周禧) 연구위원은 “한국과 네덜란드는 노조의 구조부터 다르다”면서 “완전한 산별(産別)체제인 네덜란드에서는 노동계 대표가 참여하는 사회경제협의회(SER)의 결정사항이 나중에 하부조직에서 바뀔 가능성이 없지만 한국은 기업별 노조인 데다 집행부의 잠정합의마저 조합원 투표에서 수시로 부결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연구위원은 “네덜란드 등 유럽식 노사문화 모델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선진 모델을 적용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국대 조용만(趙龍晩·노동법) 교수도 서구의 (노사)협력주의를 도입할 만한 토양이 아직 부족하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조 교수는 국제노동기준과 부합하도록 △개별기업 복수노조 인정 △필수공익사업장 범위 축소 △실업자의 노조원 지위 인정 △공무원노조 인정 △노조 전임자 임금지원 금지조항 삭제 등을 하루빨리 앞당겨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절충은 가능한가=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영미식과 유럽식은 완전히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별 문화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서 “한국적 절충이 가능하다”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조 교수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는 조건을 만들고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국식 노사관계 신 모델’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 이지만 교수(경영학)는 “파업 등 노사분쟁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도 노사관계의 새로운 틀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며 “시장원리냐(영미식), 노사정 타협이냐(유럽식)라는 양분법적 질문은 나라별 다양성을 무시한 발상”이라면서 한국적 모델이 가능함을 내비쳤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아태담당 부국장 완다 쳉 박사도 “정부가 준법을 원칙으로 하면서 노사간 대화의 조정자로 나서는 것이 가능하다”면서 “노사자율 해결이냐, 노-사-정 타협이냐 하는 양자는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다”고 말했다. 쳉 박사는 “한국은 외환위기 직후처럼 노사정위원회를 활성화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김용기기자 ykim@donga.com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네덜란드 모델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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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모델’은 영미(英美)식 모델과 독일식 조합주의 사이의 중간 형태이다.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세계 굴지의 식료품 공급회사 아홀드(Ahold)의 최고경영자인 시스 호밴은 ‘파이를 키우는 일과 그 파이를 공정하게 나누는 일을 병행하는 방식’이라고 이 모델을 설명했다.
네덜란드 모델이 갑자기 탄생한 것은 아니다. 1950년부터 사회경제협의체(SER)란 중재기구가 운용되었다.
네덜란드는 1959년 북해에서 거대한 가스 매장지역이 발견되면서 오히려 경제가 어려워졌다. 재정수입 증가를 예상해 복지투자가 늘어났고 가스 수출로 환율이 오르면서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어갔다. 70년대 오일 쇼크를 맞아 상황은 악화됐고 재정적자 폭은 82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7%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일하지 않는 복지(Welfare without work)’로 특징되는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다.
이때 네덜란드 노사 대표가 헤이그 교외 바세나르란 지역에서 타협을 끌어냈다. 노동자측은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임금협상을 개별 기업단위에서 할 것을 약속했고 사용자측은 일자리 창출에 힘쓸 것을 합의했다. 정부는 노사간의 합의를 존중하고 재정적자를 축소하기로 노력하는 한편 세금을 감면하기로 했다. 정부는 중재기구인 SER에 참여하는 것으로 역할을 한정시켰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등은 이 모델을 ‘제3의 길’이라 칭송했다.
이러한 타협이 가능했던 이유는 네덜란드의 화합적 전통이다.
오랫동안 둑을 쌓고 간척지를 만들어 국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축적된 국민화합적 경험이 노사간 타협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덜란드 모델은 ‘폴더(간척지) 모델’로 불린다. 또 정치적 전통도 중요하다. 네덜란드는 7개 지역으로 이뤄진 입헌군주국이다. 가장 큰 지역인 홀란드가 전체를 주도하지만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마다 각 지역정부의 동의를 구했던 전통이 ‘폴더 모델’을 가능케 했다.
82년 대타협 후 네덜란드는 지속적 성장과 낮은 실업률을 자랑하는 나라로 변모했다. 선진국으로 이뤄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평균보다 훨씬 좋은 경제실적을 보여주었다.
김용기기자 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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