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패션명가 페라가모3세 어떻게 사나

  • 입력 2003년 8월 7일 16시 19분


이탈리아 아레초에 있는 일보로 와인농장에서 페라가모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살바토레 페라가모(32). 그는 페라가모 그룹 페루치오 페라가모 회장의 아들이다. 사진제공=페라가모그룹
이탈리아 아레초에 있는 일보로 와인농장에서 페라가모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살바토레 페라가모(32). 그는 페라가모 그룹 페루치오 페라가모 회장의 아들이다. 사진제공=페라가모그룹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아레초의 ‘일보로’ 와인농장까지는 자동차로 약 40분이 걸렸다. 지난달 말 밀라노∼로마간 고속도로의 발다르노 출구부터 한가로운 전원 풍경이 시작됐지만 하얀색 대문이 열리자 펼쳐지는 250 헥타르의 와인농장은 수채화 같았다.

중세 성(城)이었던 석조 건물들은 이탈리아 부촌(富村) 투스카니 지방의 여유로움을 발산하고 있었으며,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 잎사귀들은 여름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다갈색 말들은 머리를 숙여 풀을 뜯어먹었다.

살구색 페인트 벽면에 담쟁이 넝쿨이 쳐진 저택으로 들어서자 아일랜드형 조리대, 은촛대가 놓인 14인용 식탁, 적포도주 색의 벨벳 커튼, 두루미 벽걸이 그림이 어우러진 식당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살바토레 페라가모입니다.”

영롱한 비취색 눈빛과 연회색 수트가 썩 잘 어울리는 이 남자. 농장 주인 살바토레 페라가모(32)다. 알이 둥근 선글래스, 하늘색 셔츠, 금박 추상 문양이 프린트된 다갈색 넥타이, 부드러운 질감의 구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살바토레 페라가모’ 브랜드 제품으로 차려 입은 그는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창업자 고(故)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동명(同名)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 페루치오 페라가모(57)는 페라가모 그룹의 회장이다.

●이탈리아 부자의 일상

“자리를 응접실로 옮겨 얘기할까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소품은 고풍스러운 마호가니색 그랜드 피아노였다.

“19세기 폴란드 출신 작곡가 쇼팽이 사용하던 피아노를 1995년 영국 런던 경매시장에서 구입했습니다. 침대와 식탁도 그 무렵 미국 경매시장에서 산 것이죠. 가족 모두 앤티크 수집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의 응접실은 화려하고 평안한 기분이 충만한 쇼팽의 ‘발라드 제3번’과 느낌이 꼭 닮았다. 책장에는 사냥, 앤티크, 정원 가꾸기, 주방과 요리 등에 대한 잡지와 백과사전들이 꽂혀 있다. 포도껍질을 증류해 만든 알코올 함량 40%의 이탈리아 전통주 ‘그라파’, 르네상스 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풍경화와 인물화, 벽난로 위의 도자기 화병, 은테두리 장식 액자에 담긴 아버지와 여동생들의 사진….

“주말이면 농장 인근 ‘화이트 하우스(흰색 저택)’에 머무는 아버지와 자주 사냥을 합니다. 아버지는 사냥개를 유독 아끼세요. 여름에는 폴리네시아에서 요트를 타고, 겨울에는 뉴질랜드에서 스키를 탑니다. 쌍둥이 형 제임스와는 골프와 테니스를 합니다.”

●좋은 취향 기르기

그의 오른편에는 페라가모 본사 홍보 담당인 영국 출신 여직원이 자리를 잡았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의 군살 없는 각선미는 굽이 높고 가느다란 섹시한 하이힐이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 구두 ‘마놀로 블라닉’ 브랜드죠?”(살바토레 페라가모)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회장님(페루치오 페라가모)께는 비밀로 해 주세요. 페라가모 구두를 안 신었다고 꾸중하면 어떡해요.”

어떻게 한 눈에 브랜드를 알아보느냐고 묻자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좋은 취향(good taste)을 얻기 위해 여행을 하거나 그림을 감상하는 가정에서 자랐잖아요. 저절로 몸에 밴 패션 감각이 있을 겁니다.”

영화 ‘7년 만의 외출’에서 마릴린 먼로의 홀터넥 드레스가 바람에 휙 날리던 때 그녀가 신고 있던 구두,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의 레이스업 하이힐 등이 모두 페라가모 브랜드다.

자신은 인도와 미얀마, 아버지는 러시아, 형 제임스는 덴마크를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로 꼽는다고 그는 말한다.

●가족 경영

창업자인 고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아내 완다 페라가모(82)와 페루치오 페라가모를 비롯한 자녀 5명은 여성복, 액세서리, 호텔, 인테리어 등 페라가모 그룹의 경영에 각각 참여하고 있다. 전형적인 가족경영 체제는 세월이 흘러 3대에까지 이어진다. 제임스는 그룹의 상품계획 파트를 총괄하고 있으며, 사촌 디에고 길리아노는 품질담당 파트에서 실무를 쌓고 있다.

이날 오전 일보로 농장으로 향하기 직전 페라가모 일가가 경영하는 피렌체의 호텔 로비에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녀인 호텔신라 이부진 기획부장(33)과 우연히 마주쳤다. 이 부장은 면세점 입점 브랜드 관리차 이탈리아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경영 체제에서 젊은 30대의 2, 3세대는 ‘가문의 영광’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 분주할 수밖에 없다.

“페라가모 그룹의 와인농장 경영은 패션 기업의 럭셔리한 이미지를 위해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입니다. 사업에 뜻이 없어 농장을 경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정해주신 경영 수업의 과정일 뿐입니다.”

대학을 다니지 않은 할아버지, 아버지와 달리 살바토레와 형 제임스는 미국 뉴욕대 경영학석사(MBA) 출신이다. 제임스 페라가모는 페라가모 그룹에 합류하기 전 미국 삭스 피프스 애비뉴 백화점에서 3년 동안 남성복 바이어로 일했다.

농장 방문 전날 피렌체에 있는 페라가모 본사에서 만난 페루치오 회장은 가족경영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집약했다.

“가족경영이라고 해서 자격이 없는 사람을 고용하거나 가족만이 경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석사 학력 이상과 완벽한 영어 구사능력은 필수입니다. 다른 브랜드에서 3년 이상 실무 경험을 쌓아야지요. 가족의 역할은 각자가 분명히 있습니다. 적어도 2주일에 한번씩 가족끼리 만나 식사하며 대화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스타일

페라가모 일가가 휴일을 보내는 이탈리아 아레초 일보로 농장의 평화로운 전경.

농장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정통 투스카니 요리로 점심 식사를 했다.

샐러드, 파스타, 해산물 요리에 이어 입안에서 살살 녹을 듯 부드러운 투스카니산 송아지 스테이크가 나왔다.

주방장은 일보로 농장에서 수확한 화이트와인을 함께 내놓았다. 가볍고 드라이하면서도 끝맛이 감칠맛 났다.

2000년 피렌체의 한 식당에서 열린 동창 모임에서 친구의 친구로 합석한 여자는 이듬해 그의 아내가 됐다. 보석 디자이너로 일하는 아내 역시 바쁘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요리하는 때가 많다. 토마토 소스를 이용하는 폼모도로 스파게티의 맛을 아내는 극찬한다.

“이탈리아 가정에서 남자들이 요리하는 것은 아주 일상적이고 보편화된 모습이죠.”

그는 재산의 10%는 고위험을 감수하는 주식에, 나머지 90%는 채권 형태로 투자한다고 했다. 지출은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한다. ‘돈의 가치, 명예, 아름다운 자부심을 가르쳐 준’ 할머니와 아버지에게 늘 감사한다.

그는 식사를 마친 뒤 ‘리플레이’ 진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로 갈아 입고 지프를 직접 몰고 포도밭으로 향했다. 차창을 열어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을 보니 바비 맥페린의 팝송 ‘돈 워리, 비 해피(Don't worry, be happy)’가 귓가에서 절로 맴돌았다.

●에필로그

다음날 피렌체의 페라가모 본사에서 제임스 페라가모를 만났을 때, 그는 “한국 여성들이야말로 패셔너블하면서도 고급스러움을 잃지 않기 때문에 페라가모가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레이몬드 드 말러브 아시아 담당 매니저는 “일생에 단 몇 번 마음 먹고 세계적 브랜드 제품을 구입하는 유럽 여성들과 달리 한국 여성들은 계절별로 이들 제품을 사는 엄청난 경제력을 가진 것 같다”며 “그런데 지금 한국 경제 상태가 나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마침 본사가 있는 토르나부오니 거리 주변에는 세계적 패션 브랜드숍들이 여름철 세일에 한창이었다. 30∼70% 할인하는 숍들에서는 어김없이 한국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백, 한국에 가면 200만원이야” “지금 안 사면 나중에 후회한다니까”….

쫓기듯 물건을 고르는 한국 여행객들의 분주한 모습과 글로벌 패션 재벌 가족의 여유로운 얼굴들이 오버랩됐다.

아레초·피렌체=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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