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해씨 자살과 WTO협상]反세계화 자극…대세 영향 의문

  • 입력 2003년 9월 13일 18시 11분


이경해(李京海) 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회장의 자살은 멕시코 칸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많은 외신은 이번 사건이 세계화를 표방하는 WTO 체제에 그늘을 드리우는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농업개방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 흉기로 자기 가슴을 찌른 이 전 회장의 행동은 세계 각국의 반세계화 세력을 자극해 농업 부문 협상에 상당한 진통을 예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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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해WTO항의 자살파문

하지만 국익을 중시하는 냉엄한 국제경제 환경에서 이 전 회장의 자살이 개방이라는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농업협상 타결에 걸림돌 될 듯=영국과 독일 언론은 칸쿤에서 개막된 WTO 각료회의 첫날이 이 전 회장의 자살과 항의시위로 얼룩졌다고 보도했다.

BBC방송은 “이 전 회장이 10일 농업개방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다 흉기로 가슴을 찔러 자살했으며 이씨의 한 동료는 그의 죽음이 WTO 정책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기 위한 ‘희생적 행동’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반세계화 시위대들이 연간 3200억달러의 농업보조금을 지급해 전 세계 농업교역 질서를 교란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을 규탄하며 회의장 진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씨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타전했다. 또 이번 자살사건이 WTO 회의에 그늘을 드리웠다고 논평했다.

독일 공영 ARD방송도 10일 발생한 이 전 회장의 자살사건을 중심으로 칸쿤회의의 배경과 농민들의 시위 과정 등을 소개하면서 “한국의 반세계화 운동가가 WTO를 비판하며 현지에서 자살함에 따라 이번 회의에 그늘이 드리워졌다”고 방송했다.

▽곤혹스러운 한국정부=한국 대표단과 정부는 갑작스러운 이 전 회장의 자살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을 자제하고 있다. 이 전 회장의 자살에 대한 섣부른 언급이 이번 협상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국내 농민단체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기 때문.

익명을 요구한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고인의 충정을 이해하고 매우 안타깝지만 결과적으로 국제사회에 무모한 행동으로 비칠 가능성이 높다”며 “이번 사건이 WTO 협상이나 한국 통상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예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에 어떤 영향 미칠까=이번 사건이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린다.

남미 주재 한 한국외교관은 “가뜩이나 최근 현지 언론에 한국의 과격한 노조 파업 모습이 자주 보도돼 한국의 이미지가 썩 좋지 않다”며 “이번 사건으로 과격한 한국 이미지가 각인되면 앞으로의 협상에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이번 사건으로 국내 농민 및 사회단체들이 농업개방에 ‘결사반대’하면 농업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반면 이번 사건이 농업개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한국대표단에 ‘운신의 폭’을 넓혀줄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있다.

칸쿤회의를 취재 중인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한 기자는 “이 전 회장의 자살 투쟁이 협상 과정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며 “한국이 선진국이나 농산물 수출 개발도상국들과 협상하면서 이번 사건을 부각시키면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칸쿤=이은우기자 libra@donga.com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故이경해씨는 누구?▼

10일 오전 멕시코 칸쿤에서 자살한 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련) 회장 이경해(李京海·56)씨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송파구 가락동 한농련 본부에는 정관계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고건(高建) 국무총리와 윤영관(尹永寬) 외교통상부, 허상만(許祥萬) 농림부 장관, 이의근(李義根) 경북도지사, 최병렬(崔秉烈) 한나라당 대표, 권영길(權永吉) 민노당 대표, 이우재(李佑宰) 의원 등 정관계 인사들이 보낸 조화 30여개가 분향소를 메웠다. 분향소에는 3일 동안 조문객 180여명이 다녀갔다.

전북 전주시 서신동 농업인회관, 전북 장수군 군민회관, 전북 도내 14개 한농련 시군지부에 설치된 분향소에도 농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고인은 1992년 교통사고로 부인을 잃었으며 유족으로 심장병을 앓고 있는 팔순 노모와 세 딸을 두고 있다.

28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던 둘째딸 고운씨(25)는 “아빠가 단식과 투쟁으로 험난한 일생을 살아 오셨지만 자결하실 줄 몰랐다”며 “할머니께 이 사실을 알리지도 못했다”고 울먹였다.

고인의 뒤를 잇겠다며 ‘한국농업전문학교’를 지원한 셋째딸 지혜씨(22)는 “아버지의 조언을 받으며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었는데…”라며 흐느꼈다. 큰딸 보람씨(27)는 담담한 표정으로 “아버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남아 있는 사람들과 힘을 모아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1974년 서울시립대 농학과를 졸업한 뒤 고향 장수군에서 부모의 땅과 야산을 개간해 100여 마리의 젖소를 키우는 5만여평 규모의 농장을 일군 농업경영인이자 농산물 개방 반대에 앞장선 농민운동가였다.

그는 1987년 한농련의 전신인 농어민후계자협의회 결성을 주도했으며 2대 한농련 회장과 한농련 기관지인 농어민신문사 회장을 지냈다.

이씨는 농업시장 개방 협상에 반대해 1990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할복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며 올 3월에도 제네바에서 한 달 동안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또 2001년 8월에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항의해 한 달 동안 단식농성을 하는 등 각종 시위에 앞장서 왔다.

이씨는 농민운동에 대한 열정과 농업 후계자 양성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세계의 농부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1991년 이후 민주당 후보로 세 차례나 전북도의원을 지내면서 도의회 산업경제위원장으로서 농촌 문제 해결에 몰두했고 지난해에는 민주당 공천으로 장수군수 보궐선거에 나섰으나 낙선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피땀으로 일군 자신의 농장을 모두 경매로 처분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장수=김광오기자 kokim@donga.com

조인직기자 cij1999@donga.com

▼한농련은 어떤 단체▼

멕시코 칸쿤에서 목숨을 끊은 이경해(李京海)씨가 제2대 회장을 지낸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농민후계자들이 모여 만든 대표적인 농민 단체. 87년 12월 전국농어민후계자협의회로 출발했다. 현재 회원수는 12만1000여명.

서울 중앙회를 중심으로 사무총국 산하에 9개 도 연합회와 172개 시군 연합회, 1500개 읍면회로 구성돼 있다.

실제 농업에 종사하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 회원이 전체 회원의 절반을 넘어 다른 농민단체에 비해 적극적으로 농민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0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 항의하는 대표단을 스위스 제네바에 파견한 것이나 2000년 고속도로 점거투쟁으로 농가부채 특별법 제정에 앞장섰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

정치적 색채도 짙어 1991년 지방자치제 실시와 함께 회원 상당수가 지방의회에 진출했다. 현재 지방의회 의원 276명과 농축협 조합장 155명이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때는 노무현(盧武鉉) 후보 지지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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