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돈 나의 인생]<1>'여성금융' 왜 필요한가

  • 입력 2003년 9월 17일 18시 07분


《미국의 여성 투자자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노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투자한다. 이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도 여성의 평균 수명이 처음 80세에 도달했다. 남편을 보내고 혼자 사는 10년을 위해 이젠 여성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 스스로 삶을 계획할 수 있고 필요한 돈을 만들어 쓸 수 있는 여성은 남성과 사회에 당당할 수 있다. 또 이런 여성이 우리 가정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성을 위한 금융 및 투자자 교육은 아직도 충분하지 않다. 본보 경제부는 이런 시대적 추세에 맞춰 여성의 생애설계(Life Planning)와 자산운용(Asset Management)을 집중 조명하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한국여성개발원(원장 장하진) 투자신탁협회(회장 양만기) 삼성투신운용(사장 황태선)과 공동기획으로 진행하는 이 시리즈는 매주 목요일자 동아일보 경제섹션(동아경제)에 연재될 예정이다.》

서울에 사는 주부 김경순(가명·42)씨는 올 3월 이후 주가가 오르자 슬그머니 욕심이 났다. 남편이 대기업에 다니고 30평형대 아파트 두 채가 있었지만 아이 둘이 크고 있다.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에 안전하게 노후 자금을 확보하려면 지금이라도 주식투자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식을 잘 몰랐던 그는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았다.

“집 한 채 팔아서 주식을 사. 그럼 무조건 먹어. 그 대신 꼭 최씨 성을 가진 전문가에게 돈을 맡겨야 해. 안 그러면 돈 잃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실화(實話)들=김씨는 5월 한 증권사에서 일하는 최모 팀장을 수소문 끝에 찾아가 아파트 한 채를 판 3억원 가운데 1억원을 맡겼다.

최 팀장은 영업점에 있는 후배 이 대리에게 위탁 매매를 부탁했다. 이 대리는 돈을 착실히 불려 김씨는 한 달 동안 1300만원을 벌었다. 월 수익 13%, 연 수익 156%의 고수익이었다. 그러나 다른 주식이 20% 이상 오르는 것을 본 김씨는 이 대리가 최씨가 아니어서 그렇다며 증권회사를 옮겼다.

그러나 한 달 뒤 이 대리를 다시 찾아왔다. 옮긴 증권사의 최모 과장이 실적을 높이려고 무리하게 주식을 사고팔다가 1억1300만원이 8500만원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서울 성수동에 사는 박희순(가명·65)씨의 남편(67)은 대기업 간부로 있다 5년 전 그만두면서 받은 퇴직금 3억원으로 작은 공장을 차렸다. 경영은 처음이었던 그는 그쪽 일을 잘 아는 젊은 박모씨를 간부로 ‘영입’했다. 그러나 박씨가 개업 2년 뒤 공장 재산을 빼돌려 도망가는 바람에 졸지에 생활보호대상자가 됐다.

아버지를 믿고 미국에 유학을 갔던 아들은 현지에서 돈을 벌다가 주저앉아 버렸다. 박씨는 “내가 조금만 더 알았다면 남편이 유일한 노후 생활 자금인 퇴직금을 잘 모르는 위험한 곳에 투자하는 것을 말렸을 것”이라고 후회하고 있다.

박경아(가명·46)씨는 최근 친지나 친구 만나기를 피하고 집에서만 지낸다. 그는 2001년 남편이 죽자 보험금으로 7억원을 받았다. 남편이 생전에 돈 관리를 해줘 금융 지식이 전혀 없는 그는 예금자 보호를 받기 위해 이 돈을 4500만원씩 여러 은행의 여러 계좌에 나눠 ‘보관’하고 있다.

두 딸이 대학생과 고등학생이고 은행 실질 금리가 마이너스여서 투자를 해 생활 및 노후 자금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올 3월 은행의 특정금전신탁에 가입해 카드채를 샀다가 카드채 거래가 끊겨 놀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주변에 돈이 없는 친지와 친구들을 보면 은근히 손을 벌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차라리 돈이 없던 시절이 편했다.

▽왜 여성이 금융을 알아야 하나=앞에 소개된 3명의 여성은 모두 ‘실존 인물’이다. 물론 이들이 한국의 여성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성보다 더 돈을 지혜롭게 운용하는 여성도 많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생애설계와 자산운용에 대한 개념이 없이 살다가 낭패를 보는 여성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노후 자금 마련과 관련해 한국 여성은 지금 ‘삼각파도’에 시달리고 있다.

우선 마이너스 금리 시대가 찾아와 과거처럼 퇴직금 등을 은행에 넣어두고 편안하게 노후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또 노후 자금을 스스로 마련해야 할 여성의 책임은 점점 커지고 있다. 고령화, 이혼율과 가구주 여성의 증가 등이 뚜렷하다.

물론 여성이 스스로 직업을 가지고 돈을 잘 버는 경우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과 평균 임금은 아직 남성보다 낮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02년 말 49.7%로 1970년 말보다 10.4%포인트 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성(74.8%)보다 낮은 수준이다. 또 남성의 평균임금을 100으로 볼 때 여성은 63.9에 불과하다.

여성은 남성보다 고용이 불안정하다. 2002년 말 여성의 이직률은 남성이 100일 경우 139라고 통계청은 밝혔다. 또 여성은 임시직과 일용직 취업자 수가 남성보다 많다.

마지막으로 돈에 관한 남성 위주의 사회 구조는 빨리 바뀌지 않고 있다. 임계희 한국FP(파이낸셜 플래너)협회 교육분과위원장은 “부인이 경제권을 쥔 가정이 늘었다지만 생활비를 지출하는 수준이 많고 실제로 부동산과 거액 금융자산 처분 결정은 대부분 남편이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취재과정에서는 국민연금뿐 아니라 개인연금 가입자도 남성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 펀드 가입자 수는 여성이 많지만 고액 고객일수록 남성의 비중이 크다.

▽생애계획과 자산운용을 알아야 한다=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전문가들은 여성들이 과거의 부동산 투기나 ‘재테크’ 등 한탕주의 투자나 금융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 뒤 생애설계와 자산운용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말한다.

우재룡 한국펀드평가 사장은 “20대 30대 40대 등 연령대별로 어떻게 잘 살 것인지에 대한 중요 목표(은퇴, 자녀교육, 건강, 자기계발)를 정한 뒤 여기에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마련하고 불려 나갈지를 일찍부터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 사장은 “흔히 금융 교육이나 투자자 교육은 돈이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아는데 사실은 정반대”라고 말했다. 가진 돈이 없고 앞날이 불안한 서민일수록 장기 계획을 세워 작은 돈이라고 아끼고 투자해 불려 나가야 더 나은 미래를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강창희 PCA투신운용 투자교육연구소장은 “돈 없이 오래 살 위험에 대비하는 방법은 투자와 평생근로 두 가지가 있다”며 “특히 평생 할 수 있는 일은 젊어서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평생근로를 하려면 퇴직 전보다는 사회적 대우가 좋지 않은 일도 하겠다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남편에게 용기를 주는 것도 부인의 몫이라고 강 소장은 말했다.

임 위원장은 당당하게 살려는 여성은 다음의 세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정 재산은 가능하면 부부의 공동 명의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부가 결혼하기 전에 가져온 중요한 재산도 기억해 두세요. 그리고 좋은 아내와 현명한 어머니가 되기 위해 멈추지 말고 자기 계발을 하세요.”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여성의 노후 재무목표 ▼

인생의 각 단계에는 저마다 목표가 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전문용어로는 이를 ‘생애재무목표’라고 한다. 재무목표는 대체로 연령에 따라 바뀐다. 우선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당되는 평생재무목표를 알아야 한다.

20대에는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찾아야 한다. 그 뒤 배우자를 고르면 결혼자금 마련이라는 첫 번째 재무목표와 만난다. 또 아이를 낳아 키울 주택자금 마련도 결혼 전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한 뒤 맞는 30대는 가족형성기. 우선 벼르던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루는 데 주력해야 한다. 커가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차도 바꾸고 교육자금도 조금씩 마련해 나가야 한다.

20∼30대에 안정된 기반을 다졌다면 40대에는 돈을 굴려 노후자금 마련에 들어간다. 이때 자녀들의 교육에 지나치게 비용을 들임으로써 노후자금을 축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미국 부모들처럼 연금을 붓고 난 다음 자녀교육을 생각해야 한다.

50대 이후는 서서히 안락한 노후를 즐길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자녀 결혼자금 등도 생각해야 하지만 장기간병비용 등 노후 대비에 박차를 가하는 시기다.

그리고 60대 이후 퇴직한 뒤에는 그동안 모아 둔 연금 등을 잘 관리하며 노후를 즐긴다.

평균적으로 부인은 남편보다 10년을 더 살게 되므로 남편을 보낸 뒤에도 생활이 가능하도록 노후자금 계획을 짜야 한다.

최근 높아지는 이혼율을 감안하면 부부생활 중간에 남편과 헤어질 최악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자녀교육비에 생활비와 노후자금을 몰아넣으면 늙어서 후회할 수 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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