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은행이 명예퇴직 프로그램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하고 있는 A은행 김 모 부장(49). 아무리 따져 봐도 ‘계산’이 안나와 몇 년 더 버티기로 결정했다.
대규모 적자를 보고 있는 은행들이 구조조정 계획을 속속 내놓고 있지만 고참 은행원들은 ‘버티기’로 나오고 있다. 경기침체 장기화로 재취업이나 창업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명퇴자 없어 속 타는 은행들=국민은행은 다음달 기업점포 38개와 개인점포 80여개 등 모두 120개 정도의 점포를 통폐합하기로 했다. 전국 점포 수의 10% 정도가 줄어드는 만큼 인력 감축 규모도 최소 1000명에 이른다.
하지만 최근 내부 조사 결과 명퇴를 신청하려는 사람은 200명이 채 못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2월에는 470명이 명퇴를 신청했다.
우리은행도 이달 중으로 차장급 이상 직원 1000여명을 대상으로 명퇴 신청을 받는다. 우리은행의 명퇴 신청은 외환위기 이후 상업·한일은행 합병 과정에서 실시된 뒤 처음이다.
우리은행은 18∼20개월치 임금과 6개월간의 전직(轉職)지원프로그램 제공 등을 명퇴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명퇴 신청자는 은행측의 희망인 400명에 훨씬 못 미치는 100명 안팎에 머물고 있다.
이 밖에 지난달 미국 투자펀드 론스타에 매각된 외환은행은 매각 직전인 8월 초 명퇴를 실시했으나 신청자는 24명에 그쳤다.
▽사회에 나가도 살기 힘들다=고참 은행원이나 간부급 사원들이 명퇴를 꺼리는 이유는 퇴직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
일단 실질 이자소득이 마이너스인 ‘저금리 시대’라는 점이 명퇴 신청자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퇴직 은행원들이 20개월분 월급을 앞당겨 주는 명예퇴직금 1억원을 포함했을 때 이들이 받는 총 퇴직금은 2억2000만∼2억5000만원 정도.
B은행의 모 지점장은 “2억5000만원 안팎의 퇴직금을 받아봐야 3%대인 현재의 예금금리를 고려할 때 매달 이자로 용돈도 건질 수 없다”면서 “한 달에 600만원 정도인 현재의 월급을 명목상으로라도 받으려면 15억원 이상을 은행에 넣어놓아야 한다”고 푸념했다.
명퇴 후 ‘제2의 기회’로 여겨지던 창업도 너무 위험하다. 한국프랜차이즈협회는 소자본 창업자의 폐업률이 2001년 64%에서 지난해 70%대로 올라간 뒤 올해 80%까지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은행 퇴직자들의 창업 교육을 담당했던 창업컨설턴트 이인호 소장은 “은행 퇴직자들은 사무업무에 익숙해 창업 관련 기술이 부족하다”며 “흔히 1억원 이상의 대형 창업으로 승부를 거는데 최근 경기 불황으로 성공 가능성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지난달에는 법원이 국민은행 행원이 낸 소송과 관련해 “명퇴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한직으로 발령 낸 직원에게 1억3000만원을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은행원들의 버티기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
최호원기자 bestiger@donga.com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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